내게 무슨 일이 생기든 이유를 묻지 않고 나서서 도와주고 나를 믿고 지지해 주며 내게 기쁜 일이 생길 땐 나 자신보다 더 기뻐해 주고 행복해하는 내 인생의 보석 같은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말다툼 한번 없이 서로를 알뜰히 챙기며 서로의 내밀한 비밀까지도 공유한 친구이고 또 한 사람은 직장에서 만나 30년이 되는 지금껏 서로가 어려울 때 도움을 나누며 위로와 위안을 주고 사는 10살 차이가 나는 언니다.(언니를 부르는 호칭은 '양여사'입니다)
양 여사는 언니이기도 했다가 때론 둘도 없는 친구이기도 했다가 어느 땐 친정엄마이기도 했다.
나이 차가 많이 났어도 우린 결이 비슷한 사람이었고 짧은 시간 안에 서로에게 없어선 안될 귀중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양 여사가 살며 힘든 일이 있을 땐 난 당연한 듯 양 여사 곁을 맴돌며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려고 노력했고 양 여사 역시 내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고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누며 상처 난 내 맘을 만져주려 최선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무엇보다 내가 아프고 힘들어졌을 때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하는 수많은 요구들을 묵묵히 들어주며 내 곁을 지켜주었다.
내게 어려운 병이 생기고 오히려 본가족들이 외면을 했을 때 나를 붙잡았던 사람은 오직 양 여사뿐이었다.
피를 나눴다고 다 가족이 아니었다.
그리고 난 양 여사에게 평생 동안 은혜를 갚으며 살겠다 마음먹었다.
죽음으로 한 번 내몰렸던 후 나를 다시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것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아무리 설명해도 겪어보지 않고선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참혹한 고통을 매일 겪으면서도 걸을 수 없다 말했던 다리로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걸었다. 박살 난 마음으로 잃어버린 기억들의 퍼즐을 한 조각씩 끼워보려 안간힘을 쓰며 내게 일어난 재앙을 홀딱 까발려 글로 정리했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컨트롤할 순 없다 해도 망가진 머릿속의 생각과 감정이 순간순간 달라지고 있는 걸 알아챌 수 있게 됐다.아직도 수없이 절망하지만 그만큼 다시 떨쳐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힘에 부쳤다.
한 가지 병이 조금 차도를 보이는 가 싶으면 그새를 참지 못해 다른 병들이 기승을 부리며 건강은 점점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병의 기세(氣勢)를 잡아 치료의 방향을 잡았다 싶으면 다른 병이 가진 증상이 치고 들어와 모든 계획을 망쳐 놓기 일쑤였다.
마음이 힘들고 아파 생겼던 무수히 많은 병들이다시 내 마음을 흔들어 대고 있다.
너무 지치고 외로웠다.
고립무원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간신히 살아내는 일상을 버티던 날들이다.
30년을 한결같이 내 곁을 지켜주던 양 여사의 큰딸이 결혼 후에 우리가 살고 있던 지역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게 됐다.
예의 바르고 싹싹해 언제나 사랑해 마지않던 조카가 가까이 산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행복했었다.게다가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쁜 딸을 낳아 양 여사와 나를 순식간에 할머니로 만들어 버리며큰기쁨?! 을 안겨 주기까지 했다. 큰 조카와 아기가 힘들고 어두운 삶에 한줄기 빛과도 같은 일로 변하게 되리라곤 그땐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조카가아기를 임신한 순간부터 나와 딸은 조카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고아기가 태어난 이후로 우린 모두 깊은사랑에 빠졌다.
엄마를 혼자 간병하느라 고생하며 가족들과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았던 딸에게 친언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이 속 깊고 배려심 넘치며 밝고 사려 깊은 언니의 등장은 호랑이에게 쫓기던 남매가 동아줄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어릴 적 이후로 자주 왕래가 없었고 결혼식에 가서 언니를 봤음에도 그땐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인연이라 더 뜻밖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아기를 믿고 맡길 수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조카딸도 딸이 처음 찾아갔던 날 5시간 동안의 노력과 솜씨를 본 후론동생의 아기 보는 실력에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로 4개월이 조금 지난 후부터 조카와 아기가 매주 하루에 한 번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매일 익숙한 공간에서 지루함을 느끼던 조카와 아기는 문화센터를 등록하여 다니기로 한월, 목을 제외한 평일 하루에 오전 낮잠을 재우고 우리 집으로 놀러 와 저녁식사를 마칠 때까지 놀다 늦은 저녁에 돌아가기로했다.
집에는 어느덧 아기 용품이 큰 자리를 차지할 만큼 늘어나게 되었고 우리 마음에도 그만큼 큰 자리로 조카와 아기의 자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조카와 아기가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두 사람이 채우는 충만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고 위안이 됐다.
꽃 중에 제일 예쁜 꽃은 인꽃(人花)이라 하지 않던가!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럽다. 아기가 오는 날은 아무리 아파도 내색하지 않고 식사도 잘하려 애썼고 아픈 기색조차 비치지 않으려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내가 아프면 오지 않으려 할까 봐 항상 노심초사였다.
그리고 누구보다 아기와 조카를 기다리는 사람은 딸이었다.
미리 커피와 간식을 준비하고 아기 장난감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바닥에 깔아놓을 두꺼운 토퍼, 매트, 식탁의자, 보행기, 장난감, 블록, 유아용 책, 이유식용 턱받이, 이유식용 고정 그릇, 수저, 여름용 포대기, 낮잠 이불, 짱구 베개, 거즈 이불, 인견 이불... 기타 등등)을 우리 집에도 준비해 놓아 아기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짐작하고 집어주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단 한 번에 단 한마디로 내게 전달해 준 언니에게 깊은 감사와 위안, 그리고 오랜만에 느끼는 완전한 편안함을 느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기 또한 처음 오던 때의 낯가림과 어색함은 없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외가 집에는 벌써 윗 손녀가 둘이나 있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가 어려운데 이모 할미 집에만 오면 다들 자기만 쳐다보며 이쁘다고 말하고 시선을 주며 웃고 사진 찍고 정신이 없으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한, 두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간다. 그리고 그렇게 놀다 졸음이 오면 당연히 이모인 딸 ◇◇이가 아기를 답삭 안아 들고 잠자리용 토퍼를 펼쳐놓은 방으로 안고 들어가 잠을 재운다.
아기도 우리 집에 오면 엄마가 자기를 안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어디에 부딪히거나 졸음이 와서 잠투정을 해도 항상 울음 끝은 짧았다. 그렇게 아기를 안아 재우며 실컷 사랑 땜을 한 딸은 딸대로 (턱도 없이 부족하지만) 만족하려고 애쓰며 거실에 나와 준비한 맛있는 간식을 먹거나 저녁을 준비해서 먹으며 수다 삼매경에 빠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줄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딸과 저, 조카(아기 엄마)는 물론이구요^^ 모두가 사랑에 빠질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시크한 아기랍니다.애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가끔 웃음을 날려주면 으아~~!!♡♡♡
집에 오는 아기를 돌보며 애쓰는 것도 딸이고 매 번 다른 메인 메뉴로 식사 준비를 하는 것도 딸이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지만 딸은 두 사람이 가져다주는 행복과 사랑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고 얘기한다.
아기를 너무 사랑하고 예뻐서 미칠 것말 같은 마음이 든다고도 얘기한다. 자신을 알아주는 언니의 속 깊은 배려가 자신을 다시 숨 쉴 수 있게 만든다고 얘기한다.
그간 어려운 시간을 보내며 딸과 나는 너무도 지치고 고단 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적막함과 외로움 속에서 고통과 싸웠기 때문이다.
말이 많진 않지만 언제나 웃음 띈 얼굴의 긍정적인 조카와 조카 손녀가 나를 다시 살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를 더하는 아기를 보며 지니는 아기가 힘든 시간을 헤쳐 나가는 얼마나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덕분에 다시 우리의 양 여사와 자주 연락하며 못다 한 응석도 부리고 있고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을, 이 사람들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일어서기 위해 노력해봄 직도 하지 않을까? 언제나 내 곁을 지켰던 내 사람들이 오늘도 나를 지키고 있다.
나 역시 그들에게 내 넘치는 사랑을 부어주려 한다.
계속 계속... 양 여사와 그녀의 딸이 내게 그리 하고 있는 것처럼.
나와 지니는 조카와 손녀딸을 통해 양 여사에게서 받은 사랑을, 은혜를 되갚으려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렇게 행복한 순간을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 두려 애쓴다. 이것이 내가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는 방법이고 지혜라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