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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Sep 09. 2022

가족이라는 이름의 진짜 의미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그동안 나는 가족이라 하면 평상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살다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만사를 제치고 서로 돕고 의지 하며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뭉치고 단결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며 살았다.

가족의 범위는 그때그때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난 그들에겐 무한한 인내를 베풀고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며 살기 위해 나 자신을 갈고 또 갈아 넣었다.




그랬기 때문에 진작에 신뢰를 깨뜨렸음에도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용서를 구하지도, 삶의 태도를 바꾸지도 않은 남편의 변화를 기다리며 27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던 거라 믿는다.


또한 피를 나눈 내 형제자매가 내가 가장 처참히 무너져 돌봄과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내게서 손을 거뒀을 때도 그들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마음이 더 컸었다.

내가 그들에게 주었던 사랑과 헌신도 역시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긴 마찬가지였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데 왜 내가 어려울 때 그들이 날 돕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원망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난 그들에게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의 베풂이나 배려, 돌봄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통증을 매일 몇 번을 겪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겪으며, 독한 마약 진통제의 부작용을 막지 못해 환청과 환시에 시달고 자율신경기능 이상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다가, 걷다가, 앉아 있다가, 샤워하다가, 용변을 보다가, 밥을 먹다가, TV를 보다가 의식을 잃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기절했다. 그러면 딸이 이불을 가져 쓰러진 나를 끌어 눕히고 침대로 옮기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눕혀 두고 차가운 수건으로 의식이 돌아오도록 애쓰 119에 전화해 응급실로 쫓아갔다.... 이보다 더 힘든 일들이 허다했지만 어느 누구도, 심지어 함께 사는 남편조차도 딸에게 매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물어봐 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막 성인이 되어 나를 돌봤던 딸은 너무 힘들고 지친 나머지 쓰러지게 됐고 그 일을 계기로 머릿속 뇌에 병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그 병도 역시 희귀 난치 질환인 MS(다발성 경화증)린 나이에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외로움에

견디다 못한 아이의 머리에 병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걸 알게 된 이후로 난 내 형제자매를 이해할 마음이 없어져 버렸다.


내가 나눈 사랑과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들 그리고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하게 한건 다 내가 사랑이 많아서였다고 치자. 그러면 적어도 남이 아닌 내가 너무 아파 정신줄을 놓고 있는 와중에 온 집안이 떠들썩하도록 사랑했던 첫 조카 마음 하나 살펴주기가 그리도 어려웠을까?

자기 딸보다 더 사랑한다는 헛소리를 해대며 애가 사주는 간식이며 영양제를 알궈낼때는 그렇게 자주 해대던 전화번호를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보다. 아니면 늦는 날 자기 아들 돌봐달라고 아르바이트비 더 준다며 꼬실 때만 아쉽고 밥 만들어 먹이고 숙제 봐주고 설거지에 청소까지 해주는 조카 혼자 고생하고 있는 건 남(언니)의 일 이니까 쌩까지나 보다.


그들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나를 버리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 딸에 대한 사랑이 멈춰졌다는 걸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 입으로만 했던 사랑이었던가 보다. 아이의 병을 알게 된 후 나는 말할 것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큰 절망감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나와 피를 나눈 형제자매였기에 더욱 그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변명도 핑계도 다 소용없다. 파렴치한 것들이다. 인간의 한없는 어리석음 앞엔 헌신도 눈물도 피도 다 소용없었다.


내가 아프게 되고 외로움에 몰리면서 가장 슬프고 후회했던 한 가지가 있었다면 내가 사랑을 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나와 같을 거라 착각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원했던 건 공감과 따뜻한 위로 그 두 가지뿐이었는데...


그들에게 준 사랑을 돌려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돌려받기 위해 주었던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딸이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것.... 그 사실이 뼈가 시리도록 사무쳤다.

총명하고 똑똑하다 스스로 자부하고 살았던 내 인생은 멍청하고 우매한 나 자신으로 인해 망가져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브런치를 시작해 모든 일의 시작부터 돌아가 글을 쓰며 깨우치게 된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다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비록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은 아닐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향한 내 노력이나 사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꼭 피를 나눠야만 가족일까?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산다면 그 어떤 가족보다 더 든든한 울타리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내가 평생 의지하고 믿었던 가족은 나를 밀어 버렸지만 나와 함께 오랜 인연을 맺어 온 친구와 지인들은 오히려 나를 더욱 든든히 지키고 있다. 내겐 힘든 순간을 빠짐없이 지켜주신 교회분 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 친구들 그리고 살면서 인연을 맺은 많은 지인들이 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귀한 은혜 인복(人福) 덕분이다.


그런 귀한 인연들 중에 직장 생활을 하며 만나 30년이 되도록 서로의 곁을 지키(실과 바늘이라고 불리던) 10살 차이 나는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언니가 있다.

언니의 딸이 아기를 낳아 매주 하루씩 집에 놀러 오고 있다.(이 얘기로 글을 쓰는 중이에요^^)

더 늙기 전에 가까운 곳에 함께 살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집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지만 알다시피 요즘 부동산 매매가 전무해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무저갱 같던 어두운 지난 시간을 견디고 이제야 밝은 빛이 보이는 듯하다.

이제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 행복하기만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아픔에 물든 병든 내 몸도 건강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드시 그러리라 믿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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