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반드시 큰 성공을 목표로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매사에 최선의 노력을 하며 사는 것은 대부분 마찬가지 일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노력한 대로, 계획한 대로만 인생이 흘러간다면 우리의 삶엔 희로애락(喜怒哀樂)이란 말 자체가없어지지 않을까? 모두가 자신이 정한 목표를 두고 열심히 노력해계획표대로 인생을 편히 살기만 하면 될 테니까!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유치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는무렵까진 비교적 비슷한 출발선에서 시작한다 생각해도 그 이후론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능력, 목표와 상황에 따라 점차 다른 인생 시간표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더 이른 시간에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목표에 도달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 인생의 완성이라 말할 수는 없다. 성공과 돈, 명예가 인생을 완성시키는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여러 가지 사정들로 조금 늦은 출발을 했다 하여 뒤처졌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감을 잃을 필요는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중에 빨리 내 달리는 것만이 옳은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중하고 천천히 자신을 가다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대기만성형의 인간도 반드시 자신만의 시간표로 인생을 완성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다만 이런 당연한 것들을 알게 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까울 뿐이다.
두 번째 희귀 난치 질환을 선고받고 쓰러졌을 때 난 내 인생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진 평범한 대로 평범한 만큼의 힘듦과 또 그만큼의 행복을 누리며 남은 인생도 그럭저럭 살아갈 거라 믿고 있었다. 내가 준비하고 예비했던 인생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상황들을 겪으며 내 인생이 나에게 빅 엿을 먹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걸 인정한 순간 난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함께 사는 남편도 내가 아픈 것을 남의 일 보듯 했으며 평생 동안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을 나누고 도우며 살던 친정 가족들은 내가 가장 힘들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나를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내겐 그 사실이 내가 앓는 병보다 더 깊은 절망이었다.
이미 베체트와 다른 병들을 앓고 있던 내게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는 치명적이었다.
죽을 것만 같이 아픈 통증을 겪으며 나는 정신도 함께 놓아 버렸고 삶의 의지를 잃으며 날로 악화되어 가는 내 생명줄을 이 세상에 붙들어 놓은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딸 지니였다.
자율신경 실조증까지 겹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나를 두고 의지할 곳도 의논할 곳도 없이 아이 혼자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와 한동안은 차마 말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정신이 조금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그 시간에 대한 위로였고 사과였다.
사실 투병생활을 하며 무엇보다 가장 내가 견디기 괴로운 것은 딸이 나를 간병한다는 사실이다. 꿈 많고 재능 많은 자식을 나 때문에 주저앉혔다는 죄책감은 수시로 나를 괴롭혔지만 간병인을 쓰자는 내 말을 아이는 번번이 단호히 거절하며 내게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엄마랑 단둘이 이렇게 시간 보낼 때가 또 있겠어? 엄마가 안 아프면 더 좋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엄마가 얼른 나으면 돼. 그리고 다른 사람 한텐 엄마 못 맡겨. 내가 해야지."
사리분별을 못할 만큼 급격히 쇠약해지고 불안정해졌던 난 나를 버렸던 가족들에 대한 배신감과 여러 가지 병들에 휘둘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딸은 날 지키기 위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한 채 내게 매달렸다.심지어 자신조차 희귀 난치 질환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됐을 때조차 엄마인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런 걱정 없이 부모만 믿고 편안히 살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집안 살림을 하며 제대로 먹지 않으려는 엄마를 위해 식사 준비를 해야 했고 모든 병원 스케줄(6개 과에 진료를 다닙니다)을 관리하며 진료를 데리고 다녔다.
먹는 약도 내가 아프기 시작했던 30대 초반보다 너무 많이 늘어나 내가 관리할 수 없는 상태였고 내 증상과 증세에 따라 변하는 약을 관리하기 위해 딸은 여러 가지를 찾아보고 공부를 하며 대응해 나갔다. 시도 때도 없던 응급실 내원과 수시로 하던 장기간의 입원 시 보호자도 역시 딸이었다.
감당할 수 없던 통증과 남편의 무관심, 가족들의 대한 분노가 쌓여내 모든 것이 끝이라 여겨져 죽음으로 내몰렸을 때도 의식을 잃고 요단강을 건너게 된 나를 낚아채 다시 세상으로 돌려놓은 것도 오직 딸 지니의 노력뿐이었다.
그 후의 투병 생활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전쟁 같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을 오롯이 견디며 나를 지켜준 딸에게 항상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함께 느끼고 있다.
나를 지키고 보살피느라 지니의 20대는 소리도 없이 스러져 가고 있다. 혹자는 언제가 됐든 자신이 원하는 걸 하기 위한 시간은 주어질 것이라 말하며 딸을 위로하기도 한다. 나 역시 사람마다 인생의 시간표는 다르다는 것을 믿고 있지만 아이의 엄마 입장에서 자식의 젊음을 볼모로 내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만 느껴졌던 때도 있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하지만 삶을 포기할 정도로 악화 일로를 달리기만 하며 침대에서 제대로 일어나 생활조차 하지 못하던 나를 다만 몇 시간이라도 거실의 소파에 나가 앉아 있게 만든 딸의 노력과 사랑에 진심으로 내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항상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약속했다. 반드시 모든 병에서 회복해 지니가 낳은 세 쌍둥이를 길러주기로!
지난 9년간의 시간을 다 기억하고도 다시 옛날로 돌아가 똑같은 상황에 놓인다 해도 자신은 변함없이 같은 선택으로 엄마를 살릴 거라 말하는 내 목숨보다 귀한 딸 지니에게 반드시 노력한 만큼, 헌신한 만큼 보상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시간표가 짜여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