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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Apr 07. 2023

부모의 유산(遺産)

닮을 것인지 다르게 살아갈 것인지

흔히 부모의 유산을 얘기면 대부분의 사람들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 부모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남기고 간, 또는 남기고 갈 재산(財産)먼저 떠올리게 마련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재물(財物)이나 동산(動産), 부동산(不動産) 같은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나를 통해 가르쳐 주시고 보여 주신 사랑과 헌신, 그리고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모의 부족함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은 내가 내 자식에게 어떤 방식으로 유산을 남기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해 보려 한다.




보통 문제없이 부모의 사랑을 골고루 받고 자란 가정의 경우  자식들도 대부분 부모님이 양육했던 방식 그대로 자신의 아이들을 기르게 마련이다. 

가정 내에 중요시 여기는 관습이나 특징적인 모습을 중요하게 여기며 대물림을 하려는 집안의 경우에 부모의 양육방식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런 가정일수록 가족 구성원 간에 서로를 중히 여기며 결핍을 겪는 경우의 수가 적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내가 부모님의 방식대로 닮살아갈 것인지, 르게 살아갈 것인지 조금은 달라지게 되기도 한다.

 자기 부모님이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는지에 따라 자신의 삶의 방식 결정되고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도 변화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자기 부모님의 양육 방식이나 성격에 크게 상처 입은 사람이라 해도 성인이 되어 반드시 그 그늘을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성장기에 겪었던 일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본인 스스로도 같은 모습을 내 보이며 사는 안타까운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부모님이 보여 주었던 잘못된? 양육 방식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오히려 더 나은 방향으로 자신이 받지 못했던 부분을 아이에게 채워주려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 또한 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나는 어떤 자식이고, 어떤 부모였을까.




아버지는 전쟁을 경험했던 다음 세대에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오로지 자신의 영민함과 노력 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고 성장하셨던 분이었다.

그에 비해 엄마는 포목 장사를 하셨던 할아버지의 4녀 2 남중의 장녀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다 아버지를 만나 함께 고생하시 지금의 가족을 이루는데 크게 공헌을 하신 내조의 여왕 이시다.


한참 발전기에 있던 우리나라에서 돈도 없고 빽도 없던 아버지께서 강남에 자리를 잡고 또 다니던 직장에서 승승장구하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과 노력을 했을지는 따로 말하지 않으셨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때까지 하셨던 노력은 옆에서 지켜보던 우리들에게도 가히 피나는 노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가 성공하시기까지 일에만 몰두하실 수 있도록 집안의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시며 내조하셨던 엄마의 노력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 삼 남매를 위해 언제나 최선의 노력을 다 하셨던 두 분이었다.


아버진 주말만 되면 우리를 데리고 산과 계곡으로 나들이를 나가 평소에 느꼈을 아버지의 부재를 채워 주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그 노력은 내가 딸을 낳은 후에도 이어져 친 손주로는 형님네의 두 딸에 이어 별다른 이쁨을 받지 못한 것에 비해 외 손주 첫 손주였던 지니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랐다.

딸을 낳았을 때 몸이 많이 약했던 나를 위해 일하는 분을 붙여 주시며 유독이 당신을 닮은 첫 손주 지니에게 직접 하셨던 말씀을 아직도 지키고 계신다.


"지니야. 네가 하는 모든 처음, 시작은 모두 할아버지가 해줄 거니까 우리 지니는 건강하게 크기만 하면 돼."


그리고 실제로 지니가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과 배우고 싶어 하는 운동기구, 악기 심지어 옷까지. 입어보지도 못하고 나누어 주었던 옷들이 차고 넘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딸의 중, 고등하고 교복과 대학 등록금까지 심지어 딸이 20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도 매달 용돈을 주셔야 직성이 풀리시는 말 그대로 모든 걸 베풀어 주실 만큼 자식에겐 더없이 후한 분이시다.

하지만 오히려 당신 위해서는 천 원 한 장 쓰기를 아까워하셔서 홀로 등산을 가셨다가 드실 물이 떨어져 목이 잔뜩 마른 상태로 돌아오시더라도 사이다 한 잔을 맘 놓고 못 사드시는 그런 분.


직장 다니실 때 입던 양복만 여러 벌일 뿐 제대로 된 외출복 한 벌을 장만해 드리기 어려웠다.

본인이 쇼핑하시는 걸 극도로 싫어하셨고 선물로 사다 드려도 반품을 하기 일쑤셨다.

쓰시던 지갑이 너무 낡아 가죽이 다 닳고 내지가 너덜거리도록 다 찢어졌어도 돈을 벌게 해 준 지갑이라며 절대 새것으로 바꿔 드리지 못하게 하셨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해야 할 본분을 다 하심과 동시에 아버지가 무엇인지, 남편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 등 모든 것에 본보기가 되셨다.


어머니는 척박한 상황에서 성공하시기에 노력하시는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를 내조하시며 우리 삼 남매를 케어하시느라 고생을 하셨다. 아버지가 은행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계셨지만 예나 지금이나 외벌이로 셋이나 되는 자식들을 건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월급날이 되면 바로 길 건너에 있는 백화점을 마다하시고 항상 다른 동네에 있는 재래시장을 찾아 열 손가락이 미어지도록 장을 봐서 돌아오셨다. 장을 봐서 돌아오시는 길에 전화를 하시면 어렸던 우리 삼 남매는 집 앞의 버스 정류장에서 엄마가 돌아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장을 봐오신 물건을 나눠 들고는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 물건들에 딸려왔을 맛있는 손만두나 순대등을 기대하면서.


아버지와 엄마는 자신들의 삶과 가정에 충실하셨고 자식들을 위해 최선을 다 하셨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게 비록 나를 길러준 부모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목표한 일을 달성하기 위해 온몸이 부서져라 일하며 정이 많고 가족을 사랑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으셨던 아버지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분노 조절 장애(간헐적 발성 장애)'

아버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았다.

어제는 괜찮았던 일이 오늘은 괜찮지 않았다.

어느샌가 우리는 아버지가 퇴근하고 돌아시면 불을 켠 방에 바퀴벌레가 흩어 도망가듯 각자의 방으로 도망가 쥐 죽은 듯 숨어 있기 바빴고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시면 방바닥에 요를 깔고 두툼한 불을 덮어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언제, 어느 때, 무슨 이유로 화를 내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퇴근하신 이후론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했다. 내가 25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와 성격이 전혀 다른 남자와 결혼을 서둘렀던 건 본가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덕분에 똥을 밟았지만. 

다행히? 아버진 물건을 부순다거나 누군가를 때린다거나 하는 몹쓸 짓까지 더하진 않으셨다.


엄마는 아버지와 달리 다정함 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뚝뚝한 분 이셨다. 어릴 적엔 '엄마가 과연 우리를 사랑하기는 하시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잔 정이 없는 분이었다. 

내가 먼저 가서 안겨도 팔을 둘러 안아 주시는 법이 없는 엄마.

다쳐서 들어와도 상처를 먼저 살펴주기보단 꾸중부터 하시던 엄마.

셋 중에 한 사람이 잘못을 해도 셋을 모두 불러 빗자루로 때리다 못해 자신의 다리까지 피멍이 들도록 때려 체벌의 이유를 잊은 채 공포에 떨게 하시던 엄마.

어릴 적엔 엄마가 나를 사랑하기는 한 것인지 수없이 많은 날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내가 처음 ♥♥이를 낳았을 때 엄마가 아기를 안고 어르고 달래며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며 온 가족이 모두 놀라워했었다.  모습을 보고


"엄마도 아기 이뻐할 줄 알아? 세상에!! 난 엄마는 아기든 어른이든 사람은 안 좋아하는 줄 알았지."

"나라고 왜 아기가 이쁘지 않았겠니. 너희들 키울 때는 너무 힘들어서 이뻐하고 말고 할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 손주는 내가 이뻐하기만 해도 되고 버릇은 너희가 가르치면 되니까 난 사랑만 주면 되지."


하지만 엄마의 이런 말 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서먹하며 이기적인 모습과 엄마였음에도 기댈 수 없었던 고단함으로 지쳐갔고 타인에게 엄마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힘든 일들을 내게 털어놓는 바람에 나는 오랫동안 '감정 쓰레기통' 노릇을 며 입안의 혀처럼 살았다.




부모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겪으며 살 때 삼 남매가 함께 했던 약속이 있었다.

우리가 부모님께 받았던 넘치는 사랑은 그대로 우리 아이들에게 흘러넘치게 하되 우리가 부모님께  받았던 두려움과 공포, 외면, 체벌을 빙자한 폭력,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살게 만든 그 모든 것들은 절대로 대물림하지 말자 말했었다.


오빠(한때는 그렇게 불렀던)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 보다 더 맥락 없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떤다는 얘기를 들었다. 경제적 능력도 안 돼서 아직도 아버지 도움을 받으면서. 한심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나만 이렇게 생각할까?

동생(역시 한때는)은 내가 지키고 사는 것 정도로 선을 지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조카가 남자 아이라 쉽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체벌하지 않았으며 내가 잘못한 일은 몇 번이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아이가 얘기하면 경청하기 위해 노력하고 사고가 나거나 큰 소리가 나면 먼저 다치지 않았는지를 물어봐 주고 내가 아무리 많이 아파도 아이의 아픔을 먼저 챙기려 노력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한다고 자주 안아주고 자주 얘기해 준다.


내 부모님이 내게 주신 것보다 더 많은 걸 줄 수 없을진 몰라도 다른 걸 물려줄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내가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정신적인 유산이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가길 바라고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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