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못 산 것일까?
믿음이 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교회에서 여러 가지 책무를 맡아 바쁘게 살아가면서 조금은 행복해졌다고 생각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삶은 내가 그렇게 쉽게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남편과의 트러블은 드러내어 문제 삼지만 않았을 뿐이지 여전히 터지기 일보직전의 폭발물 같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이 철없는 막내였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이른 갱년기를 겪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영악한 남편은 밖에서나 교회에선 좋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항상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웃고 다니며 영업을 하며 익힌 노하우로 누구나와 잘 어울리는 남편의 모습과 당차고 똑 부러지는 성격을 가진 나를 보며 친한 집사님들은 ㅂㅂ집사님이 나루집사님 하고 살아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돼. ㅂㅂ집사님이나 되니까 나루집사님 성격 맞추고 살지~~. ㅎ ㅎ ㅎ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데려다 살아봐라.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 입으로 남편의 흉을 본다고 해도 내 얼굴에 침 뱉기일 뿐이었고, 바깥에서 보이는 남편의 모습은 서글서글 웃기 잘하는 호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정적으로 본다면 남편은 방관자 그 자체였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진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묻은 채로 참아가며 살아갈 수 있었다. 아니면 그때까지 한번 들킨 외도 이의엔 더 이상 큰 잘못 없이, 소소한 잘못 들로만 나를 괴롭혀 견딜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 마침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딸과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며 딸에게 스스로 겪고 있는 어려움 외에 다른 문제를 만들어 주지 않으려 부모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과 암묵적인 휴전에 동의하고 있는 상태 이기도 했었다.
오로지 내가 참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새벽마다 교회로 달려가 울며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아이는 거센 태풍과도 같은 사춘기를 보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됐지만 사춘기를 겪으며 힘들어했던 딸의 가장 큰 괴로움은 아빠에 대한 불신과 미움이었다.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나는 지금까지도 상처로 남아 있을 남편의 못난 모습에 대해 아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려 노력해 왔다. 다행히 아이는 나의 노력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해 주었고, 이제는 영혼의 단짝 같은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는 모든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기회를 주신 순간들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이와 아빠가 지난 시간을 제대로 풀어낸 적 없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큰 짐이 되었다.
우리 가족(친정 가족)은 아버지의 배려로 같은 동네의 같은 아파트에서 함께 모여 살았다.
내가 몸이 많이 아파지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을 때에도, 내게 조금 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기로 결정하는데 큰 제약이 없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를 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릴 적엔 그다지 부유하게 자라진 못했지만,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 삼 남매가 성인이 될 무렵에는 강남에서 자리를 잡았고, 우리가 모두 결혼한 후에도 아버지의 배려로 아버지 댁 근처의 아파트에서 함께 모여 살 수 있었다.
난 삼 남매 중 둘째였지만, 오빠하고는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실질적으로 보면 항상, 대부분 맏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부모님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지만 한 수 앞을 생각해서 필요하신 것들을 챙기려 노력했고 혹여 찾으시는 게 있으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구해서 갖다 드리는 일상이 당연하다 여기며 살았다.
내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부모님이 베풀어 주신 경제적인 지원에 어떻게든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난 세상 모든 돈에는 그에 따른 대가와 책임, 그리고 보이진 않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부모님은 자신들이 고생하며 살았던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베푸는 것을 아끼지 않으셨지만 어느 순간 돈은 족쇄가 되기도 했다.
평생 동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살 수 없었다.
오빠는 소심하고 나약했다.
학창 시절에 여러 가지 일들을 저지르고 바로 잡지 못해 평생도록 부모님의 속을 태우며 뒷바라지를 받는 아픈 손가락 같은 자식이었다.
외벌이를 하며 셋이나 되는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했기에 지금까지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다.
나 역시 매달 두세 번 장을 봐주고, 과일을 사주고, 새 언니에게 따로 몇십만 원씩 챙겨주며 어려운 시부모님을 근교에서 잘 챙기고, 까탈스러운 오빠를 잘 맞춰주며 사는 새언니와 마음을 나누고 살았다.
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고 조카들이 선교원의 어린이 집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친 동기간 보다 사이가 좋은 시누와 올케라며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게 났었다. 교회에서 친하게 지내던 집사님들이 질투를 할 정도였다.
동생은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아이였다.
무뚝뚝하고 잔정이 없는 성격이었지만, 조카를 임신하고 입덧을 하는 동안 한결같이 챙겨주는 나를 보며 성격이 달라진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다.
동생이 아이를 낳고 11개월이었던 조카를 9년 동안 내가 맡아 키우게 됐다. 출근을 앞두고 있던 동생은 내게 말했었다.
언니, 언니한테 남편이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해. 내가 돈으로는 어떻게 못 도와줘도 언니한테 힘든 일이 생기면 절대 모른 척하지 않을게. 평생 언니한테 고맙게 생각하고 살게.
난 이 말을 마음 깊이 새겼었다.
처음 교회를 다닐 때부터 조카를 업고 안고 유모차에 태우고 다녔기 때문에 나를 잘 알지 못하는 교인들은 조카를 내 아들이라고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렇게 조카를 내 아들 삼아 키웠다. 최선을 다해서 키웠다. 혹여 내 딸인 지니 보다 신경을 덜 써준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먹는 것도 더 좋은 것을 먹이고, 지극정성을 다 했다. 다만 9년 중에 마지막 2년은 딸의 미친듯한 사춘기를 감당하느라 조카를 처음처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 한 가지가 내 맘에 깊이 못 박혀 있는 양심의 가책이다.
아버지 밑에서 같은 동네에서 함께 모여 사는 것은 생각보다 근사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경제력이 든든한 부모님 밑에서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 아이들을 함께 기르며 같은 동네에 모여 사는 것은 단점보단 장점이 더 많다고 여겨졌다. 따로 떨어져 살지만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형국이었기에 아이들은 저절로 어른들을 공경하는 법을 배웠고 함께 나누고 노는 법을 익혔다.
휴가도 날짜를 맞춰 함께 놀러 가고 부모님 댁이 분당 근처에 테라스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신 후엔 매주 함께 모여 고기를 구워 먹거나 외식을 하며 가족 간에 우애를 다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가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토록 사랑하는 내 가족들이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만큼 나를 엄청 사랑하고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비록 남편과의 사이가 벌어지고 있어도 가족들이 있다면 견디지 못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가족들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했다.
어느 날부턴가 양쪽 어깨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은 어느새 낮이나 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심해졌고 팔은 어깨 위로 올릴 수가 없어졌다. 기껏해야 앞으로 나란히 정도의 높이가 전부였고 그나마도 오래 올리고 있을 힘도, 무거운 것을 들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갔다.
이미 앓고 있는 베체트와 혈관성 두통도 모자라 다른 쪽으로 몸이 불편해지자 혹시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서둘러 집 근처 병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몇 달의 시간을 흘려보냈고, 결국엔 베체트를 치료받고 있던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되었다. 동네 정형외과에서 찾지 못했던 어깨의 문제는 '회전근개파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몇 달간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으며 통증 치료를 하고 경과를 지켜보던 중에 다행히 왼쪽 어깨는 통증도 줄어들고 움직일 수 있는 반경도 정상을 찾아갔다. 문제는 오른쪽 어깨였다. 증세가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고 치료를 시작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에는 오른쪽 어깨를 수술하기로 결정했다.
처음 양쪽 어깨에 회전근개파열이 발병하고 난 후 오른쪽 어깨를 수술하기로 결정하기까지 남편은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남편을 원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빌고 또 빌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기로 작정하신 분 같았다.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 손을 잡으며 함께 내 곁을 지켜준 사람은 오직 딸 지니뿐이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