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내가 우습기라도했던 건가. 운명은 지난날의 영광을 잠시 맛보게 해 준 후에 정말 손쉽게도 나를 다시진창으로 끌어내려 처박아버렸다.
불안에 떨고 있던 것이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저지르는 놈 따로 있고 수습하는 놈 따로 있다 더니...
결국엔 내 개인회생 폐지예정 통지서가 날아오고 말았다.
5년 중에 4년 4개월을 납부하고 8개월을 내지 못한 채 남아 있던 개인 회생을 폐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누구의 잘못이었든 간에 지금은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한다.
남편이 사업을 시작했을 때 처음 한동안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몇 달은 벌어오는 돈의 반을 현금으로 도로 가져가고 남은 돈으로도 세금을 내고, 생활을 하고, 돈을 모아도 가능할 것처럼 굴러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잠시만 생각해 봐도 짐작할 수 있을 게다.
1, 총수입으로 들어온 돈의 반을 현금으로 가져간다. 2, 그리고 남은 돈으로 종합소득세, 부가가치세, 원천세, 4대 보험료들을 원래 들어온 총수입을 기준으로 계산해서 납부한다. 3, 마지막으로 남는 돈으로 기타 모든 비용을 감당하는 업체가 몇 년을 버틸 수 있었을까? 아니, 몇 달을 버틸 수 있었을까?
(제 기억이 정확하지 못해 답답한 부분이 많지만) 정말 몇 달 지나지 않아 바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남편이 가져가야겠다고 말하는 수입의 반을 내줄 수가 없게 돼버린 것이다. 그 돈을 가져가면 당장 납부해야 하는 돈에 차질이 생기거나 생활비가 모자라는 일이 비일비재 해져 갔다. 답답한 마음에 남편을 붙잡고 얘기를 해봐도 매번 같은 말 뿐이었다.
거래처를 늘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당신이 힘들겠지만 그 돈 안 주면 주문을 안 넣어 줘서 수입이 안 늘어. 그러니까 좀 아껴 쓰면서 해봐.
난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고 감당도 안돼. 당신 말대로 했는데 그럼 지금 거래처가 늘어났거나 기존 거래처에서 수금이 늘었어야지. 가져가는 돈은 그대로 가져가서 써야 하고 더 가져오려면 기다려야 한다면 그동안의 리스크는 뭘로 감당할 건데?거래처가 늘어나는 건 어렵고 리스크 감당할 방도는 없고. 내야 할 돈은 많고 당신은접대한다고 술 마시고 골프 치고... 동네 구멍가게를 해도 이렇게 안 하겠어. 나한테 자꾸 아껴 쓰라고 하는데 내가 아픈데 조카까지 보면서 생활비 보태고 친정에서 돈 주시고. 여기서 내가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못하겠어. 당신이 가져가서 관리해.
내가 밖에서 내내 있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데 세금 계산서 같은 걸 어떻게 바로 발행해? 집에 있는 당신이 좀 도와줘야지.
남편은 막무가내였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복잡한 돈 문제 같은 건 모두 내게 떠 넘겨 버리고 본인은 좋은 차 타고 다니며 거래처를 빌미로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며 술에, 골프에 빠져 정작 자신이 챙기고 보듬어야 할 가족을 등한시하고 다녔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내가 얻은 건 고칠 수 없는 수많은 불치병들 뿐이고, 잃은 건 나를 이루는 소중한 모든것들이다.
후회조차 아까운 이 시간이 애가 타고 막막해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마저 메말랐다.
몇 개월씩, 몇 년씩 먹물로 덧칠한 듯, 동영상 필름을 가위로 싹둑 잘라내 버린 듯 기억이 몽땅 지워지고 없어져 버렸지만 어떤 순간은 흐릿하게 또는, 선명하게 사진처럼 낱장으로 남은 기억들이 있다.
그날의 기억이 그렇다.
아직 투잡을 하지 않던 때의 남편이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고 나는전날 수면제를 먹었음에도 아침이 될 때까지 한숨도 못 잔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는 자율신경 실조증이 증세가 유독 심해 기절하는 일이 너무 빈번해서 혼자서는 침대 밖으로 잘 움직이지 못할 때였고 자살 사고가 있은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던 때라 모든 것이 온전하지 않은 때였다.(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때와 다른 것을 한 가지 말하면 그때는 제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지 못했었어요. 제 상태가 어떤지를 알고 인정하는 데만 6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늦게까지 나를 케어하느라 애를 쓰다 잠든 지니가 아직 일어나지 못한 이른 아침이었다.
띵~동 띵동 띵동 쾅쾅 쾅!!!
문 좀 열어 주세요! 빨리 안 여시면 강제개방 하고 들어 갑니다. 문 열어 주세요.
띵동 띵동 띵동....
그렇게 들이닥친 사람들은 뭐라고 말을 붙여 볼 새도 없이 집안의 가전이나 가구등에 빨간 차압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머릿속에 차고 넘치는 문장과 단어들이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말릴 생각도 없이 한쪽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는 남편을 쳐다보고 무슨 일이냐고 소리를 지르며 방에서 뛰쳐나오는 지니를 바라본 후 난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그날의 일은 유난히 선명한 사진을 들여다보듯 뇌리와 마음에 깊게 새겨졌다.
그렇게 아픈 내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개인회생을 시켰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내가 개인 회생을 시작할 때에도 남의 일 보듯 했던 남편이 막상 내가 더 아파지고 회사일과 집의 경제권을 돌보지 못하게 되자 그 일을 모두 지니에게 떠넘겨 버렸다. 남편은 가장도 아니지만 아빠도 아니다. 자신도 중증 질환을 앓으며 몸과 멘털이 모두 망가진 엄마를 밤낮으로 간병하느라 지쳐가는 딸을 위하는 마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다.남편은 자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처음 개인 회생을 할 때 변호사를 선임해서 진행을 했었다. 변호사 사무실을 통해 개인회생 폐지예정 통지서를 확인하고 상담을 진행했다.
남편이 집을 나가기 전쯤엔 사업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만큼의 돈을 벌고 있었고(결국엔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만살아남기 위해 함께 애쓰던 딸 마저 모른 척하고 나가버린 상황이었기에 특별면책 신청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다시 여러 가지 서류를 준비하고 변제금 납부를 지체한 구체적인 진술서를 첨부하고 변호사 비용으로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비상금을 탈탈 털어 넣었다. 특별면책 결정이 나면 이제 공식적인 빚은 없어지겠지만 통장에 돈 한 푼 없는 거지 신세이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직 내겐 남편의 책임 회피로 모든 것을 떠안은 지니의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번에도 남편은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개인 회생을 준비하던 그 고통스럽고 힘든 시작부터 4년 4개월 동안 납부하는 내내 남편은 단 한 번도 힘들진 않냐고, 고생스럽진 않냐고 내게 묻지 않았다. 안타까워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모든것이 내 탓이고 모든 일이 지니탓이라 여기는 사람이란 걸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은행원이 되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도움을 주는 친정을 두고 잠원동에 자리 잡아 가족들과 함께 모여 살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소박한 삶을 살거라 꿈꿨던 내 삶은 어디서부터 박살이 나 버렸는지 알 길이 없다.
희귀 난치병 2가지와 난치병 2가지를 포함한 여러 합병증을 앓는 50대 초반의 빈털터리가 지금의 내 모습이다. 하루에 5~6시간도 깨어 앉아 있기도 힘든 환자의 삶이다. 그 마저도 마약 진통제 없이는 견디기 힘든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나를 지키고 딸을 지켜야 한다.
처음부터 모든 게 남편의 잘못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남편은 모든 걸 망쳐버렸다.
바람을 피우고 가장의 의무를 포기한 사람이 결혼한 대가를 배우자인 나와 내가 나보다 더 사랑하는 딸 지니가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