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넘도록 날 간병해 주는 외동딸 지니는 긍정적이고 예의 바른 아이다. 아이를 밝고 긍정적으로 키우고 싶어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도 끼어들지 않도록 난말투나 행동거지부터 조심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남편과 화목하게 살 수 없었다.
아이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 부족했던 부분은 친정 가족과 한 동네에서 대가족을 이루며 함께 살면서 메꾸어 나갔다. 딸은 무엇보다 친정 부모님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어른들을 잘 따라 동네에서 어르신들의 예쁨을 받기도 했다. 아이는 활발하고 몸이 쟀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렁거리는 성격은 아니다.
그런 아이가 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바로 다음 해인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자주 넘어지기 시작했다. 집 근처부터 조금 먼 곳까지 잘 본다고 하는 정형외과를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특별한 이상을 찾을 수 없었고 지니는 학창 시절 내내 반깁스를 몸의 일부처럼 여기며 살았다.
아이는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종종 심한 두통과 시력 이상을 호소했다. 칠판에 쓰여있는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 많이 아파서 고생했던 터라 걱정되는 마음에 여기저기 안과를 전전했고 3차 의료기관인 성모병원까지 갔지만 역시 특별한 이상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시험기간이 지나가면 두통이나 시력 문제가 나아졌다. 일 년에 한 번 외엔 웬만해선 학교에 절대 찾아가지 말자 주의인 나였지만 키가 커서 항상 맨 뒤에만 앉는 지니가 시력 때문에 힘들어할까 저어 되는 마음에 딱 한 번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죄송하지만 몇 줄만 앞에 앉혀 달라고.
그때 더 노력하지 않은 내 잘못인 걸까, 아니면 지니를 진료하고도 지니의 병을 발견하지 못한 지니를 진료했던 수많은 의사들의 잘못이었을까. 돌이켜 생각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다발성 경화증은 병의 특성상 초기에 발견시 장애 발생 정도를 낮출 수 있다.지니의 병이 초기에 발견 됐다면 지금 지니가 겪고 있는 병으로 인한 모든 어려움이 훨씬 나았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론 나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용서하기 어려웠다.지니의 경우 증상이 시작되었음에도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이미 중기를 넘어 많이 진행된 상태에서 병을 발견했다.
회색 병변으로 뒤덮인 지니의 뇌 사진을 본 이후 내 밤은 단 하루도 악몽이 아닌 날이 없다.
지니에게 본격적인 증상이 발현된 건 내가 두 번째 희귀 난치질환인 crps를 진단받고 3년이 지난 후였다. 그땐 나도 희귀 난치병만 두 가지에 여러 합병증과 함께 진행된 십수 가지의 다른 병들로 내 몸 하나도 혼자 추스르지 못해 지니가 없이는 먹지도, 씻지도, 자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게다가 남편의 잘못으로 가족들과도 모두 틀어지고 지니 역시 혼자서 나를 간병하며 아빠의 회사 일을 돕고 집안 살림까지 하며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때였다.
지니가 처음 얼굴의 감각 이상과 팔, 다리의 마비 증상을 호소했을 때를 제외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련의 과정과 검사, 진단, 충격과 슬픔, 고통 중에 남편은 그 어디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냥 지니와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진료를 보거나, 진단을 받거나, 재발을 해서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한 날에도 괜찮냐는 말 한마디를 건넬 줄 몰랐다.
남편은 왜 우리와 함께 살고 있었던 걸까? 본인이 말했던 그대로 남들도 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아니면 혼자되는 것이 두려워서? 남들은 엄마와 딸이 함께 죽을 때까지 고통받지 않는다.
난 죽을 때까지 죽도록 아프면서 시력을 잃고 사지가 마비되어 가는 딸을 돌봐야 한다.
재발과 완화가 반복되는 MS의 특성상 새로운 신약이 지속해서 개발되길, 그 약을 쓸 수 있는 돈이 제 때에 마련되길, 돈을 모을 수 있는 노력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지니가 처음 시력상실을 호소하고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을 때에도 올바른 정신과 신체를 유지하고 있지 못한 내가 입원실로 따라가 함께 헤매며 (지니는 병실 침대에서 저는 보호자 침대에서요) 검사를 진행했다. 그때에도 난 끔찍한 통증들과 여러 가지 증상들, 심한 불면증과 마약 진통제들과 그에 버금가는 두통 진통제, 졸피뎀, 모르핀, 아티반... 그 외의 무수한 진정제들로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수시로 해리성 장애와 불안, 공황 장애를 겪으며 그것들을 진정시키는 자낙스와 디아제팜등을 먹으며 나를 잃고 있었지만 지니의 엄마임은 잊지도 잃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러는 중 그 어느 때에도, 지니의 병을 진단받던 그 황망하고 잔인했던 시간에도 남편은 함께 자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당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니의 병원비와 약값은 나 아니면 친정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신약이 개발되며 보험 처리되지 않는 고가의 약값에 이중으로 고통받아야 했지만 빈번한 재발로 아이가 입원할 때마다, 더 이상 1차 치료제가 듣지 않아 고가의 신약을 처방받아야 했을 때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자신이 벌어다 주는 돈 안에서 뭐든 해결하라는 식이었다. 그럴 수가 있었다면 좋았겠지. 본인이 벌이다 주는 돈이 화수분인 줄 알았나 보다.
아이가 4년 동안 자기 스스로 자신의 다리나 복부에 자가 주사를 놓는 동안 안부 한 번을 묻지 않은매몰찬 인간이다. 하물며 누나를 도와 나를 함께 간병하던 강아지 콩이가 주사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지니의 뒤를 쫓아 냉장고에 보관했던 차가운 주사를 몸에 품었다 내주며, 주사를 맞는 누나 곁을 4년 간 한결같이 지켰다. 그래도아비라는 자는 괜찮냐는, 힘들지는 않니라는 흔해빠진 위로조차 건네지 않았다.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병간호를 아픈 몸으로도 정성껏 해드렸는데. 자신의 어머니한텐 지극정성 온갖 공을 들이던 사람이 자신이 지켜야 할 진짜 가족이 누구이고, 식구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함께 살던 30년 동안 다툼이 있어도 끝내는 받아주고 품어준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와 무슨 얘기를 더 할까? 이제 우린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와이프를 헌신짝 내 버리듯 버린 사람이 자식 버리는 게 뭬 어려 울까.
남편은 집을 나가기 전 딱 한 번 지니의 약 값을 대준 적이 있다. 그것도 교회에서 도움을 받아서 보내준 돈이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남편은 그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그건 2회 차 약을 한 번 먹을 수 있는 금액 정도일뿐인데.
남편은 지니에게 지니의 병에 대해 묻거나 위로하거나 하지 않는다. 집을 나가고 9개월 만에 지니에게 필요한 것을 부탁하며 톡으로 남긴 한마디가 나와 지니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솔직한 말로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아이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를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이젠 지니에겐 오직 엄마뿐이다. 아직도 많이 약하고 아프지만 그리고 비록 죽을 때까지 죽도록 아플지라도 난 지니의 엄마다. 난 담배도 끊었고 하루에 2~3병을 마셔대던 술도 단칼에 끊었다. 그만큼 독하고 독한 사람이다. 그런 내가 30년을 참고 품었던 남편을끊어 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서 내 좌우명을 바꾸었다.
복세편살 나씨나길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나는 씨발 나만의 길을 가련다)
#위의 뇌병변 사진은 지니의 것이 아닙니다. 지니의 병변은 훨씬 많이 퍼져 있어요. 진료를 보러 가면 사진을 찍어올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지니의 병변은 중기보다 조금 더 많이 분포되어 있고 그나마 다행인 건 병변이 퍼진 것보다 증상이 많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지니는 처음 1차 치료제로 머크사의 레비도즈프리필드펜 44μg을 처방받아 4년 동안 자가주사했고 더 이상 듣지 않고 재발이 반복되어 역시 머크사의 마벤클라드를 처방받아 2년 간격으로 4회 경구 투약 후 5년의 휴약기를 가지고 있는 중입니다. 마지막 투약시기에 재발이 함께 와 아이를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마벤클라드는 몸의 면역력을 누르는 약이기 때문에 항상 다른 병이나 예방 접종등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이 그렇게 힘들어도 아픈 저를 위해 모든 걸 내려 놓아준 딸 지니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이가 제 곁에서 하루빨리 안심하고 독립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