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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사서(四書)를 읽었다

by 윤오순


독서도 ‘타이밍’이란 말을 믿는데, 내겐 중국의 ‘사서’가 그렇다. 여기서 사서(四書)는 사서오경 가운데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의미한다. 철학을 전공한 덕분에 수강과목에서 <논어>를 다루어 한 학기 맛은 좀 봤다. 그러나 수업시간에 배울 때는 별로 재미를 못 느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확실히 학부생 때였다. 교양영어 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들 중에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분이 있었는데 그 학기 수업이 끝날 때쯤 그분이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갑자기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너무 단도직입적이라 거절할 틈이 없었다. 바짝 쫄아 나오라는 곳으로 시간 맞춰 나갔는데 흥미로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겨울 방학에 <논어>와 <중용>을 읽을 예정인데 중문과와 국문과 학생이 참여의사를 밝혔고 철학과 학생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참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학기 교양영어 수업 듣는 걸 지켜보니 네가 영어에는 흥미가 없는 것 같은데 우리 공부모임에는 제격으로 보여 접선(?)을 시도했다고 했다. 모임의 리더는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분으로 출소한 후 학교에서 일괄 복학시킬 때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해 그냥 딱 봐도 나이가 많아 보였던 것이다. 나를 한 학기나 지켜봤다는데 딱히 거절의 명분이 없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공부는 바로 시작되었다. 조용한 카리스마의 리더는 한자를 잘 모르는 둘을 위해 천자문을 쓰고 외우게 했는데 곧 공부 시작 전 리추얼이 되었다. 난 아주 어릴 때부터 천자문을 비롯해 한자와 가깝게 지내는 생활을 해서 논어를 읽기 위한 워밍업에 시간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당시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엄청 인기가 있을 때였는데 우리 넷은 모래시계를 보지 않았고 대신 그 시간에 <논어>와 <중용>을 열심히 읽었다. 덕분에 난 아직도 ‘모래시계’ 내용을 전혀 모른다. 조용한 카리스마의, 부산 사투리가 짙은, 모임의 리더가 가끔 특정 문장을 중문과 학생한테 중국어로 읽어보라고, 국문학적으로 표현해보라고, 철학적으로 접근해보라는 주문을 해서 당황할 때도 있었는데 나름 재미있었다. 학생 둘은 마무리를 못하고 중도에 사라졌는데 나와 그 리더는 끝까지 마무리를 하고 관악산 등반도 같이 하고 가끔 막걸리도 같이 마시고 그랬던 것 같다. 친밀함의 의미로 집에 한 번 초대를 했는데 내가 리더가 생각한만큼 가난한 학생이 아니라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직접 두 귀로 듣고 우리 인연은 끝났지만 덕분에 <논어>와 <중용>을 무사히 읽어낼 수 있었다.


내친 김에 <맹자>와 <대학>을 읽으려고 책을 구입해 펼쳤는데 도무지 혼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름 작심삼일 프로젝트 기법(매 3일 다시 계획을 세워 실행하는…)으로 겨우 <대학>을 혼자 마쳤다. 그리고 좀처럼 <맹자>를 읽을 기회는 오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7, 8년이 지났던가. 그사이 중국유학도 다녀오고, 한참 예술학교의 대학원 과정을 다니며 문화예술 관련 일을 왕성하게 할 때인데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8개월짜리 펠로우십을 받게 되었다. 일본으로 떠날 때 짐에 ‘정신문화연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약간 파란색 표지의 두툼한 <맹자> 한 권을 챙겨 넣었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지만 8개월이면 <맹자>를 한 번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서도 ‘타이밍’이라고 위에서 언급했지만, 하필이면 내 옆방에 고대에서 ‘맹자’로 박사논문 쓰신 분이 같은 8개월짜리 펠로우십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논문도 썼으니 이제 홀가분하게 <맹자>를 읽을 요량으로 그분은 중국어로 된 <맹자> 원서를 가지고 오셨다. 우린 기이한 인연이라며 도착한 다음 날부터 점심시간 30분동안 꾸준하게 <맹자>를 읽었고 가끔 주말에는 더 오랜시간 같이 읽었다. 점심시간 30분을 이용한 건 점심시간에 식당이 혼잡해 조용해지는 시간을 찾다보니 그렇게 된 건데 그시간이 그냥 공부시간이 되었다. 오랜 박사과정 동안 수행자처럼 공부하던 습관이 남아있던 분이라 나도 그분의 가볍지않은 몸과 마음 가짐을 존중하며 정말 재미있게 <맹자>를 읽었고 무사히 마쳤다. 내가 가져 간 책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날 머물던 국제교류센터의 2층 구내식당에서 조촐하게 와인파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방 저방 흩어져 있던 낡은 사서를 보니 정말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옛날옛날에 #독서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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