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온 지도 어느덧 10개월이 다 되어 간다. 요즘 가장 편한 삶의 태도를 하나 꼽자면, ‘쩌리’로 사는 것이다. 괜히 중심에 서지 않고, 괜히 평가받으려 애쓰지 않고, 기대를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조용히 머무는 것. 생각보다 그 위치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해외에서 오래 살다가 팬데믹 시기에 한국으로 갑작스럽게 돌아와 몇 년을 정착하며 살았다. 발을 땅에 붙이지 않고 살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착지는 거칠었다. 심리적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상은 계속 굴러갔고, 그렇게 몇 해를 버티는 동안 몸과 마음이 서서히 닳아갔다.
해외에서 커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대학이 아니라 작은 카페에서 평일 몇 시간씩 커피를 팔았다. 설거지를 하고, 컵을 깨고, 전깃불 스위치를 헷갈려 손님 앞에서 매장을 암전시키기도 했다. 연구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는지 뜨거운 라떼였는지 헷갈려 손님에게 다시 묻는 날도 있었고, 점심시간 직장인들이 밥을 먹고 빨리 커피 한 잔을 원한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수십 명을 줄 세워 놓고 커피를 제때 내리지 못해 욕을 한 바가지씩 먹는 날들도 이어졌다. 그 일상은 오래 붙들고 있기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과정을 건너뛸 수도 없었다. 주문을 받고, 기계를 만지고, 손을 움직이는 그 시간이 빠지면 카페는 더 이상 카페가 되지 않았다. 커피 한 잔이 나오기까지 거쳐야 하는 단계는 생각보다 훨씬 많고 또 복잡했고, 그 하나하나를 몸으로 익히고 책임지는 일은 결국 내 몫으로 남았다. 그래서 그 시간은 피하고 싶은 시간이면서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 일을 잠시 멈추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커피를 연구하고 있다. 매일의 평화로운 일상에 감사하며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똑똑한 학생들이 많은 학교에 있다 보니 학생들과의 대화도 즐겁고, 자신의 깊고 넓은 세계를 요란하지 않게 보여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사실도 행운처럼 느껴진다. 도쿄에 왔다고 연락해 만나는 사람들 역시 모두 새롭고 신선해서, 누구를 만나든 그 시간만큼은 지치기보다는 호기심이 먼저 앞선다.
모든 걸 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살던 시간에 비하면 요즘의 나는 훨씬 느슨해졌다. 적당히 쩌리로 지내는 삶도 나쁘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못하는 건 어쩌라고, 모르는 건 또 어쩌라고. 그렇게 살아도 삶은 계속된다.
사진은 작년 연말, 도쿄에 놀러 온 작가님에게 받은 선물이다. 이걸 받고 2026년에는 드립 실력을 좀 키워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결론은 늘 같다. 그냥 살던대로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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