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농사꾼이자 장사꾼이었다.
할머니의 직업은 엄밀히 따지면 농부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고등학교 때까지 매년 부모님의 직업에 대한 질문에 답을 적어서 내야 했었는데, 그 답은 항상 주부와 농부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새삼 글로 적으니 조금 이상하네) 할머니께 여쭤보면 할머니는 스스로를 ‘농사꾼'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할머니는 장사꾼이기도 하니까, 어떻게 보면 할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농사꾼’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우리 마을에 큰며느리로 시집와서는 으레 시골 아낙네들이 그러했듯 자식들은 시어머니께 맡기고, 동틀 무렵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는 논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길쌈을 하며 베를 짜고 틈틈이 살림을 챙겼다. 지금으로 치면 N잡러, 혹은 워킹맘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때는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진 중요한 임무는 오일장에 가는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일주일의 7일 주기보다는 오일장의 5일 주기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무언가를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경우에는 5일장의 루틴에 따라서 한 달이, 그리고 일 년이 짜인다. 우리 할머니는 4일 동안 부지런히 기르고, 장안날(=오일장의 전날을 의미한다, 그날이면 온 동네가 바쁘다.)에 수확을 마친 장거리(=장에서 팔 상품을 의미한다)를 오일장에 가져다가 팔았고, 그게 우리의 생계수단이었다. 할머니는 손으로 직접 심은 채소 오일장에 내다 파시며 그 손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셨다.
그렇기에 오일장은 나와 닭(=언니)에게는 더욱 특별한 곳이었다. 오일장에 서린 추억이 가득한데, 따뜻한 추억도 서늘한 추억 등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장날 버스를 타고 출퇴근할 때, 오일장을 지나친다. 도시에 살다가 다시 시골에 돌아왔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오일장을 지날 때면, 모양새는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심리적 거리도 달라진 오일장이라는 공간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 사이에 공사해서 예전과는 달라지긴 했지만, 마음속 한 편에는 할머니가 주로 배추나 토마토를 팔던 할머니의 구역이 여전히 남아 있다.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날씨의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사시오, 사시오”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을 잡기 위해 간절히 외치는 할머니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본인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정성껏 기른 채소를 가지런히 내보였을 할머니를, 빨리 장거리를 털어 내고, 붕어빵이라도 사서 어린 입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동동 굴렸을 할머니를 떠올린다.
할머니는 이제 장에 다니지 않는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대학에 가게 되면서 집을 떠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장사를 접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할머니는 이미 여든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사이에 할머니의 또래였던 오일장 동료들 또한 장에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오일장은 매 5일마다 열리지만, 그 시절 생계를 위해 모여들었던 장사꾼들과 오일장은 더 이상 없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추억의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 오일장으로 먹고 자라서인지, 오일장의 기억을 조금씩 소화하고 싶다.
#에필로그
길거리에서 할머니들을 마주치면, 특히 생계 활동을 하고 계신 할머니들을 볼 때면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떠오릅니다. 지금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까마득한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할머니의 오일장은 할머니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매우 큰 이벤트였기 때문입니다. 오일장에 얽힌 추억들이 많은데, 너무나 당연했던 일상이 이제는 추억 속에서도 옅어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써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오일장의 기억들을 조금씩 써나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