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애정 표현은 바로 포옹인 것 같다. 서구 문명에서와 같이 일상적인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볼에 입을 맞추는 것은 우리의 일반적 정서와 동떨어져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악수를 애정표현이라고 여기기엔 지나치게 딱딱하고 형식적인 감이 있다.
반려견을 향한 애정표현은 여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간식과 먹이를 주는 것, 놀아주는 것, 함께 뛰는 것, 때로는 따끔하게 야단을 치는 것 또한 반려견을 책임지는 견주가 할 수 있는 일종의 애정표현인 셈이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견주의 따뜻한 포옹만큼 녀석들을 행복하고 마음 편하게 해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제노는 어려서부터 사람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참 좋아했다. 처음 만났을 무렵 체중이 4킬로그램 정도였던 제노를 안고 있자면 마치 따뜻하고 푹신한 털뭉치를 안아 올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베리안 허스키는 외모가 아름다운 견종이다. 성견의 풍성한 모발과 날렵하고 늑대 같은 모습은 로망과 환상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성견 허스키가 갖추는 미모는 자견(강아지) 시절의 귀여움이 저점으로 떨어져버렸음을 의미한다. 다소 과장된 표현처럼 들릴지라도, 허스키의 아가 시절은 그토록 사랑스럽다.
강아지 시절의 제노가 그립고 더 예뻐 보이는 이유는 바로 포옹에 있다. 허스키의 성장 속도는 가히 경이롭다.
2개월령 - 4kg
3개월령 - 6kg
4개월령 - 9kg
5개월령 - 14kg
6개월령 - 17kg
7개월령 - 19kg
8개월령 - 20kg
9개월령 - 22kg
10개월령 - 24kg
11개월령 - 25kg (성견 몸무게와 거의 일치)
2~3개월 무렵에는 모두가 제노를 한참 안아주고 보듬어줄 수 있었다. 발버둥을 쳐도 발톱만 조심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문제의 4개월 차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의 4개월차,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제노를 들어 올리는 일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9~10kg이면 작은 쌀 포대 하나의 무게와 같아서, 허리가 좋지 않은 분들이나 여성들이 들어 올리다가는 자칫 부상을 입을 위험도 있는 무게였다. 동시에 제노의 '급속 성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4개월에서 5개월, 그 한 달 사이에 5kg이 불어난 것이다.
한창 이갈이와 개춘기를 겪던 무렵이라 우리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덩치는 커지고,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상상할 수 있는 사고는 다 쳐댔다. 약 2~3주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체 왜 중대형견 견주들이 4~6개월 무렵에 파양 하는 경우가 가장 빈번한 것인지 깊이 절감한 시절이었다.
장난꾸러기에 호기심 덩어리,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내지만 신기할 정도로 품에만 안기면 몸의 모든 엔진이 꺼지고 마치 동면에 들어가는 것처럼 안정 상태에 들어갔다. 실제로 안아주자마자 심장 박동도 느려지고 숨소리도 눈에 띄게 여유롭게 변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안겨 있는 상태에서 "맘마 먹자!"는 말을 들었을 때다.
30분째 내 팔 안에서 잠들었다 깨어났다 하며 느긋한 여유를 즐기던 제노는 엄마의 식사 신호에 찬물을 끼얹은 듯 약 5초간 고개를 쳐든 채 경직되어 있었다. 그때 나의 한 손이 제노의 가슴 부근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 미동조차 없던 5초간,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던 제노의 심장박동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뛰어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레이싱을 하는 자동차들이 순식간에 가속을 하면서 기어를 바꾸고 고속주행으로 나아가는 순간처럼 유휴 상태의 엔진이 터질 듯이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이게 바로 진정한 '본능'이구나. 제아무리 인간인 나라도 심장이 그렇게 쿵쾅댄다면 쉽사리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이후, 무작정 제노의 본능을 억제하거나 통제하려들지 않았다. 머리나 이성이 작동하기 전에 심장부터 뛰는 녀석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5개월 이후부터는 아가 때의 모습보다 성견의 모습과 체격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털갈이도 시작하고(진공 청소기가 고장 날 뻔했다), 유치가 빠진 자리에는 튼튼한 영구치가 돋아났다. 6개월 무렵엔 중성화 수술도 거쳤다. 그리고, 정말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조차도 제노를 안아주는 데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제노를 데리고 산책하고, 때에 따라 녀석을 안을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체력과 근력을 길러놔야겠다는 결심이 선 시기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그토록 다짐해도 꾸준히 운동을 하기가 어려웠는데 커져가고 세져 가는 강아지 덕에 다시 운동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급성장이 이루어진 4~7개월의 시기가 지나가고 8개월 차에 접어들면서부터 제노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식탐도 줄고, 이갈이가 끝나 갉아대는 사고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동시에 산책과 운동에 큰 열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2~3km씩은 뛰어야 가장 행복한 표정과 제스처가 나오기 시작했고, 만일 걷는다면 최소한 5~6km 정도는 움직여야 했다. 덕분에 아빠의 급격한 체중 감량이 이루어졌고, 엄마는 참 건강한 결과가 나왔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고 그를 기반으로 더 발전된 형태의 행복과 안정을 추구하는 시기가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침실만큼은 제노의 출입 금지 구역이었는데, 특별한 말썽을 일으키는 법이 없어 특별히 우리가 신경 쓰지 않을 때면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와 발치에서 잠들기도 했다.
이젠 누구도 자신을 번쩍 들어 올려 안아주고 재워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아빠가 소파에 누워 낮잠을 청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면 다가와 한쪽 발을 내밀며, '안아주세요!' 하는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소파 위에서 셋이 나란히 잠든 적도 있었다. 점점 '야생'이라기보다는 '사람'에 가까운 습성과 생활 패턴이 제노에게 익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 사진을 보고 위로 쭉 스크롤을 올려 2.5개월령의 사진을 보면 제노가 대체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내 손과 손가락의 크기에는 변화가 없지만 귀여운 강아지는 거의 흰 멧돼지 수준으로 불어나버렸다. 지금은 이 사진보다 약 3kg 정도 더 성장했으며, 전반적으로 사지가 좀 더 길어졌다.
20kg 쌀 포대보다 무거운 제노지만, 소파에 앉아 번쩍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엎드리게 한 다음 선풍기 바람을 쐬면 시원한 동시에 보송보송하고 따뜻하다. 그래서 올 여름에는 늘 퇴근 뒤에 제노를 안고 거실에서 잠들곤 했다. 물론 제노도 함께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제노는 11개월령이다. 곧 첫 돌을 맞이하게 된다. 우여곡절도 많고 여러모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다 좋은 추억이고 경험일 뿐이다. 이렇게 안아주던 모습들을 돌이키다 보면 한 가지 소원이 생긴다.
'단 하루만. 단 24시간만 맘껏 안아줄 수 있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정말 하루종일 안고 예뻐해 줄 텐데.'
허스키를 품에 안아줄 수 있는 시절은 너무나 짧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너무나 소중하고, 또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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