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ssian Sep 24. 2015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II

'행운'


 우연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만큼 '행운'이라는 것 역시 믿지 않는다. 다만 모든 인과 관계와 연결고리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벌어지는 일 엮이는 인연 하나하나에 늘 깊은 의미와 당위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제노와 함께 걷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예 허스키를 키우게 된 건 행운'이라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고 ' 잘 해주고 운동도 꼬박꼬박 시켜주는 주 만나 강아지가 행운을 누리고 있다'표현는 분들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웃으면서 "아닙니다, 행운은요, 무슨!"이라고 답하곤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에서는 '한 이틀만 맡아주시겠어요? 좀 쉬고 싶어서요...', 혹은 '그나마 미용 등에서 손이 덜 가는 견종이니 망정이지 만일 섬세한 관리가 요구되는 견종이었으면 제노는 참 불행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등의 매우 상반된 감상이 떠오르곤 한다.


제노야, 너는 정말 행운의 아이콘이니?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보통 '행운'이 부르는 잭팟이 터지기까지 얼마만큼 많은 역경과 인내가 필요한지를 생각해보면 굳이 행운이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도 없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행운이라는 존재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갑자기 찾아오듯 제노 우연에 우연, 그리고 또다시 겹친 우연의 일치로 우리 품에 안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갑작스럽게 약속이 하나 미뤄지고, 늦잠을 자는 바람에 당일의 계획이 틀어졌으며, 덕분에 혼자서 해결해야 했던 일을 제노 엄마와 함께 처리하러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일이 금방 끝나는 바람에 시간이 남아버렸다.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낼지 고민을 시작하려는데 제노 엄마가 갑자기 근처 펫샵에 강아지들을 보러 가자 했다.


그렇게 우리는 제노와 만났다.




제노가 처음 집에 온 날. 펜스를 통째로 끌고다니는 바람에 다음날 모두 치워버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날은 약속이 있었어야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혼자서 일을 처리하러 나서야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시간이 전혀 남지 않았어야 했다.

평소대로라면 그 펫샵에서 분양하는 가장 큰 견종은 기껏해야 프렌치 불도그 정도의 중소형견이어야 했다.

원래의 마음가짐이라면 다시 개를 키우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어야 했다.


다만 그날은 그 모든 '계획'이라는 것이 한꺼번에 어긋나기로 작심한 날이었던 듯하다.


 바로 다음날 나는 일찍 집나서 출근길에 펫샵에 들렀다. 그리고 제노를 데려오겠다고 계약서를 다. 일주일 뒤, 제노는 우리 가족이 되었다. 분명 어떠한 '운'(luck)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는 일말의 감은 있었지만 그 운이 과연 어떠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운일지에 대해서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제노와 함께하는 날들이 행운(Good Luck)으로 느껴지는 시간도 있었고, 지독한 불운(Bad Luck)으로 느껴지는 시간도 있었다. 요즘 제노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은 '애증 덩어리'라는 단어가 현실화된다면 바로 저 모습을 띄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한 차례 예쁜 짓을 하고 나면 정확히 한 차례 미운 짓을 골라서 하고야 만다. 그런데 요즘 들어 생긴 문제가 다. 차곡차곡 쌓여만 가던 고운 정情, 미운 정이 이제는 마음속 깊스며들어버린 것이다.


아빠 슬리퍼를 왜 네가 신고 있어


 요즘은 어지간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크게 혼을 내기가 어려워졌다.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금방 캐치하고 잘못했다는 제스처를 취하는(일반적으로 그저 혼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제스처인 경우가 많지만 제노의 경우엔 자신이 왜 혼나고 있는지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을  보이는 반응이 확연히 다르다) 것도 있지만, 녀석의 눈빛과 혼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혼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까닭이다. 제노 엄마는 대형사고나 반항이 아닌 이상 사실상 혼내는 것을 포기했다. 너무 예뻐서 혼을 내지 못하겠단다. 나 역시 그런 제노의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거나 누그러지는 탓에 원래 훈육해야 할 수준의 절반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해졌다.


아가 제노 얼굴 찌부만들기



 이렇게까지 정이 깊이 들었음에도 아직 확실히 우리의 만남이 '오로지 행운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고 표현할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미운 정도 많고 마음 고생도 심했다는 뜻일까?




 그럴 법도 하지만, 신기하게도 부모의 마음이란 그렇지가 않은가보다. 미운 정도 분명한 정情이고, 마음 고생도 결국엔 일종의 애정표현인 셈이었다. 제노와 우리의 만남이 '행운'이라고 확언할 수 없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제노가 이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하고 만족한다고 해서 녀석도 그럴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해버릴 수는 없다. 어쩌면 반려견과의 관계를 자신의 입장만 고려하여 '행운'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견주의 다소 일방적인 월권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빠가 좋아하는 의자에 올려놓을 수 있던 무렵,


 제노가 물어뜯어놓은 방문이나 가구의 흉측한 몰골을 보면서 '행운'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피곤해 쓰러져 있는데 놀아달라고 거대한 몸을 비비적대고 들이밀 땐 '폭군'처럼 느껴진다. 여기저기 배변 사고를 쳐댈 때엔 '애물단지'라는 생각도 든다. 산책길에서 새나 다른 개를 보고 달려나갈 땐 목줄을 쥔 내 몸에 가해질 충격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멧돼지'를 기르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문 앞에 기대어 드러눕는 소리가 들려 '스토커'가 따라다니는 듯한 느낌도 든다.


 맘마 먹자는 말에 밥그릇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볼 땐 '그래도 잘 먹는 자식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온다. 산책 가자는 말에 마리오처럼 콩콩 뛰어오르며 벅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순수함'이 느껴져 웃음이 나온다. 코 자자는 말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돌침대에 털썩 누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올려다보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 '굼뜬 천사'같다는 생각도 든다. 길게 집을 비울 일이 있어 하루라도 호텔링을 맡겨 놓고 외출하면 속이 다 시원하다가도 집에 돌아올 무렵이면 곤히 잠들어 있다가 심드렁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우리를 맞이하는 모습이 보고싶어 또다시 웃음이 나온다.


행운이든 아니든,

우리는 그렇게 깊어져가고 있다.





 아무래도, 제노는 우리에게 있어 '행운(Good Luck)'이 맞는 것 같다. 녀석 덕분에 미소 짓는 시간이 녀석 때문에 화를 내는 시간보다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우리 삶에 뛰어든 시베리아산 야생을 '행운'으로 길러내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있어 행운으로 자리 잡은 이 녀석이, 자기가 행운아라고 느낄 수 있을 만큼 행복을 누릴 수 있느냐이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묵직함은, 견주의 양 어깨에 놓인 행운의 기분 좋은 무게감이 아닐까.





다음 글 예고


특별편 ⅲ : 유기견(Rescued)을 품는다는 것,

이전 10화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I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