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온'
점차 겨울이 완연해지는 시절마다 특히나 그리운 것들이 있다. 뜨거운 오뎅과 국물이 담긴 길거리의 분식 트럭이나 요즘에는 잘 찾아보기 힘든 군고구마 장수는 항상 '겨울'을 따뜻하게 기억나도록 만들어주는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그들이 특히나 정겹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겨울 우리의 '체온'을 지켜주는 따끈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한파가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시베리안 허스키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영하 3~40도의 남극에서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파고 들어가 얼굴만 내밀고 잠드는 녀석들이다 보니 가장 행복한 계절이 겨울인 것도 당연하다. 한여름에는 제노와 산책이나 운동을 하고 들어올 때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하곤 했다. 둘 중 하나는 땀에 절어서 죽거나, 헥헥거리다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더운데도 불구하고 제노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곤 했다. 어차피 더운 건 매한가지니 기왕이면 주인 품 가까이에서 헥헥대겠다는 건지, 아니면 너도 한 번 더워봐라! 하는 마음인지는 알 턱이 없지만 그래도 항상 녀석의 체온이 느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사실 반려견의 입장에서는 불행이다) 땀이나 유분이 없는 제노의 털은 한여름에도 항상 뽀얗고 북실거렸다.
개의 신체에서 체온조절을 담당하는 기관은 단 둘뿐이다. 바로 혀와 발바닥이다. 땀샘이 없어 땀을 흘릴 수가 없기 때문에 지나치게 더울 시기에는 발바닥 닿는 곳을 시원하게, 혀를 차갑게 축일 수 있는 찬물을 항상 준비해 두어야 한다. 참고로, 제노는 올 여름 동안 약 1149개의 얼음 조각을 먹었다.
반려견의 체온은 일반적으로 인간보다 다소 높은 38~39도에 형성된다. 이는 다시 말해 겨울에는 '안고 있으면 절대 내려놓고 싶지 않은 생체 난로'라는 뜻이며, 여름에는 냉방 시설이 없다면 '가능하면 몸에서 멀리 두고 싶은 불덩어리'라는 의미이다.
한여름에 제노를 찾는 방법은 간단했다. 선풍기를 켜두었다면 선풍기 앞에 가면 있었고, 에어컨을 켜 두었다면 그 바람이 직격으로 닿는 멀찌감치 떨어진 위치를 찾아 그곳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둘 다 틀어놓지 않았다면 얼음팩이 놓인 침대에, 만일 얼음이 다 녹아 미지근해졌다면 바로 눈앞의 어딘가, 혹은 발치의 어딘가에 있었다.
한여름이 지나간 뒤부터는 녀석도 더위가 덜 신경 쓰이기 시작했는지 이젠 항상 '근처'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앉아 있는 발 밑, 의자 뒤, 다리 사이, 아무튼 집에는 다른 공간들도 많은데 꼭 반경 2m 내에서 굴러다녔다. 잠시 녀석이 캠프에 가 있는 지금, 가장 그립고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항상 발에 닿던 녀석의 부드러운 털과 따뜻하던 '체온'이다.
무더울 때 선풍기나 에어컨을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 제노를 올려놓으면 묘한 유토피아가 펼쳐졌다. 시원한 바람과 쌕쌕 숨을 쉬며 잠든 뽀송뽀송하고 따뜻한 털 덩어리를 온몸으로 느끼다 보면 그 자세 그대로 항상 잠들고 만다. 열 차례면 열 차례 모두, 단 한 번도 깨어 있을 수가 없었다.
제노는 어릴 적부터 안겨 있는 것, 그리고 몸에 맞닿아 있는 걸 좋아했다. 항상 품에 안기면 잠들었고, 덩치가 큰 뒤에도 다리 위에 올려 안아주면 항상 그림처럼 잠들었다. 어쩌면 맞닿은 상대의 '따뜻한 체온'을 좋아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진은 아빠 무릎 위에 앉아 한가로운 오후를 만끽하고 있는 제노의 모습이다. 저 큰 덩치로 무릎 위에서 뒤척거리고 하품하고 잠꼬대하는 모습을 보면 영원히 변치 않고 이대로만 따뜻하고 순수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덩치만 커져버렸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나는 그대로인데 어느 샌가 세상이 작아져버렸다'가 아닐까.
안고 있던 제노를 내려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데나, 그리고 아무렇게나 마치 카펫처럼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지나가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쩐지 한 번 만져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게끔 만드는 매력이 있다.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쓰다듬어주면 눈만 살짝 떠서 '뭐야 또?'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고 잠든다. 다시 갈 길을 가면 갑자기 뒤에서 고개를 드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하면 뒤에 뭔가 허옇고 큰 털뭉치가 쭐래쭐래 따라와 근처에 드러눕는 모습이 보인다.
정말 웃기는 녀석이다.
따뜻한 제노의 체온이 전에 없이 그리운 시간이 다가온다. 상상만 해도 이렇게 쌀쌀한 날씨에 제노를 안고 있으면 얼마나 포근하고 안락할까, 군침이 돈다. 아쉬운 점은 올 겨울 전부를 제노와 함께할 수는 없다는 점이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래도 겨울 일부는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육아의 시기이고, 쪽잠이 난무하는 시절이지만 그래도 왠지 우리 집 어딘가에 제노가 있어야만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체온'이 완성될 것 같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아주 약간만, 의젓해져서 돌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후후후 (사실 기대도 안 한다.....)
주변의 많은 분들이 묻는다. 대체 실내에서 저렇게 큰 개를 어떻게 키우냐고. 글쎄, 앞집에 그레이트 데인 한 마리를 키우는 부부가 이사 온 이후로 그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분들의 숫자는 조금 줄어든 것 같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키울 수 있다, 없다를 논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이분법적이고 답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다.
제노와 함께하고 싶었던 최초의 순간이 있었고, 녀석과 함께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던 슈퍼사고뭉치의 시절도 있었다. 지독한 인내를 가지고 '이번 한 번만 참자'는 다짐으로 마음을 다잡던 시절도 있었고, 녀석이 없으면 어쩌지 하면서 남 몰래 눈물을 흘린 시간도 있었다. 여러 감상과 마음으로 수 놓인 시간들이 지나가고 나니 이젠 녀석이 그저 '가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는 '키울 수 있다' / '키울 수 없다'와 같은 단순한 사고 구도로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키울 수 있을지 없을지의 여부는 얼마만큼의 인내심과 이해심을 발휘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기에 단언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육아를 시작한 지금, 분명히 단언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시베리안 허스키와 함께 하는 삶은 아기를 낳아 돌보고 기르는 삶에 비해서는 정말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존재가 자신의 삶 속에 등장할 때 일으키는 마찰과 파장의 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앞으로의 삶에서 차지하는 그 존재의 비중은 비약적으로 커진다. 쉽게 오는 것은 쉽게 떠나가고, 어렵게 품은 것은 영원히 남는 것이 이 세상의 숨은 단면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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