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가 부재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곧 아가가 태어나 어수선해질 것을 대비해 잠시 제노를 가을 캠프에 보내 두었기 때문이다. 명절이나 휴가 등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집을 비울 때마다 애견 호텔링을 맡기곤 했지만 아무래도 덩치가 커지다 보니 맡긴다 해도 제노가 맘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이 부족했다.
고심하던 차, 제노 주치의(?) 분이 제노가 맘껏 뛰놀 수 있는 운동장이 확보된 애견 학교를 추천해주셨고 우리는 지난주, 제노를 사흘 정도 맘껏 뛰놀다 오라고 보내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뛰어 놀았는지, 제노는 사흘 사이에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살이 쪽 빠져 있었다. 물론, 제노는 일주일 정도 지나자 다시 뚱뚱한 펭귄형 멧돼지의 실루엣을 회복했다(애견학교에서 급여하는 사료가 달랐던 점도 한 몫했던 듯하다).
제노는 약 두 달간 집을 떠나 애견 학교에서 친구들과 맘껏 놀며 시간을 보낸 뒤 돌아올 예정이다. 제노가 돌아올 즈음엔 새로운 가족이 생겨 있을 것이고 익숙하면서도 또 새로운 형태의 삶이 녀석을 맞이할 것이다.
이제껏 제노의 매력과 모습, 버릇, 장난감 등 여러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이번에는 제노의 '빈 자리'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존재'하는 만큼이나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바로 '부재'하는 상태이지 않은가.
중대형견과 실내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아무리 깔끔을 떨고 청소를 자주 해도 10분 만에 다시 원상 복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케이지나 반려견의 격리된 생활 공간을 따로 마련해두지 않고 우리처럼 평소에도, 외출할 때도 '방목'을 하면 이는 곧 중력이 작용하는 모든 부분에 발자국이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노가 수련회(?)를 떠나기 전까지 우리는 평소 매일 아침저녁으로 한두 차례씩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했다. 언젠가부터 슬리퍼 생활을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털갈이 시즌에는 날아다니는 털을 빨아들이려고 공중에 대고 진공청소기를 붕붕 돌릴 정도였다.
그랬던 집이 지나치게 깔끔해졌다. 요즘 아무리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다지만 제노 군의 발랄라 반나절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닦아 낼 발자국도, 소파와 식탁 아래에 널려 있는 털과 콧물 자국도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상쾌한 아침과 고요한 저녁을 보내고 있지만, 제노 발자국이 없는 집은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진다. 산책 뒤에 발을 씻고서 다 마르지 않은 발로 콩콩콩 물 스탬프를 찍고 다니는 모습, 공을 던져주면 침범벅으로 만들어 온 집에 굴려대던 모습, 혼자서 물을 마시고 입도 닦지 않은 채로 여기저기 줄줄 흘리고 다니던 모습이 모두 왠지 그립다.
매일매일 함께 외출해서 3~5 km 가량을 걷거나 뛰던 파트너가 자리를 비우니 자연스럽게 운동량이 줄어들어버렸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것이 초여름이었는데 여름부터 가을까지 비교적 날씬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9할 이상이 제노 덕이었다. 좋으나 싫으나 하루 한 차례 이상은 밖에 나가 바깥 바람도 쐬고, 운동도 하고, 광합성을 할 기회가 꾸준히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노가 캠프에 가 버리자 나는 홀로 남아버렸다. 함께 산책하던 길이나 제노가 열심히 응아와 쉬야를 하던 구역을 혼자 서성일 이유도 없어 어쩐지 육신이 게을러졌다.
반면 제노는 애견학교의 넓은 부지에서 신나게 뛰놀고 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길고 튼튼한 산책용 줄을 이용해도 제노가 산책 중에 맘껏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반경 8m가 한계이다. 제약할 수밖에 없음에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다른 일부 견주들처럼 목줄을 하지 않는다거나 한적한 곳이라고 해서 잠시라도 풀어줄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라도 제노가 제약 없이 마음껏 뛰어 놀고 제발 '모래시계형' 몸매가 되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너무 오랫동안 '항아리형' 몸매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항상 집안 구석 어딘가를 메우고 있었던 덩어리가 없으니 알 수 없는 휑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 때에도 제노는 항상 발치에 와서 긴 한숨을 내쉬고 드러눕거나 내 발등을 핥다가 잠들곤 했다.
식사 예절도 잘 모르는 제노는 엄마와 아빠가 밥을 먹을 때면 옆에 와서 놀아달라고 치근덕댔고, 어쩌다 비가 와서 산책을 하지 못하는 날에는 떼를 쓰느라 성가심의 절정을 보여주곤 했다.
그런 녀석이 막상 없으니 항상 귀찮던 시간들이 텅 비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면 쪼르르 뛰어들어와 아빠 발치에 눕던 제노가 보고 싶다.
밥을 먹은 뒤 항상 흥분해서 장난감을 물고 뛰어들던 제노가 보고 싶다.
저녁 시간만 되면 밖에 나가자고 산책용 줄이 들어 있는 서랍 앞에서 낑낑대던 모습이 그립다.
철야 작업 때마다 한 순간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새근거리며 옆에서 잠들어있던 알 수 없는 든든함과 따뜻함이 그립다.
퇴근해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혼자서도 신나게 노느라 기다리지도 않았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그 해맑음이 그립다.
불과 두 달이라는 시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을 뿐인데 무슨 호들갑이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노가 가족이 된 이래로 우리는 사흘 이상 떨어져 본 적이 없었기에 녀석의 부재가 새삼스럽게만 느껴진다.
앞으로 두 달 뒤면 우리의 거대한 폭군이 야외 활동을 마치고 더욱 건강하고 강인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솔직히 말해 펭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않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우리는 제노의 빈 자리를 대신할 작은 허스키 인형을 하나 구매했다. 그 이름은 제노 Jr.로, 신기할 정도로 제노와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아기에게 '이게 바로 네가 곧 만나게 될 우리 집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란다' 하면서 흔들어주면 나중에 제노를 직접 보아도 조금 더 친근하게 느끼지 않을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이토록 실감이 나는 일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약 일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우리 삶에 뛰어든 시베리안 허스키 한 마리는 이제 어엿한(?) 성견이 되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존재이자 일부가 되어 있다.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간다는 사실이 기쁘고, 함께 할 시간이 줄어간다는 사실이 슬프다. 남은 두 달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제노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우리 품에 뛰어들어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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