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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Feb 21. 2016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VII

'면회'


 우리 털북숭이 아들을 잠시 애견학교에 보내 둔 지 벌써 꽤 시간이 흘렀다. 신나는 겨울 캠프에 와일드한 아들내미를 보내 두었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사실 제노를 만나러는 벌써 몇 차례나 다녀왔다. 녀석이 야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비교적 긴 편이기에 매달 심장사상충 약과 외부기생충 약을 가져다 접종시켰고, 장이 예민한 제노를 위한 사료와 마음껏 뛰놀면서도 관절에는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관절 사료(!)까지 챙겨다 날랐다.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는 상황임에도 마음은 늘 제노에게 미안했다. 물론 다른 강아지들과 신나게 뛰어놀고 바깥공기를 마음껏 만끽하느라 여념이 없겠지만, 그래도 부모의 마음이란 건 그렇지가 못하다는 걸 느낀다. 같은 사료를 주더라도 내 손으로 덜어주고 싶고, 똑같이 뛰놀더라도 직접 함께 뛰놀아주고 싶고, 산책을 하더라도 녀석과 연결된 리드줄의 반대편 끝은 내 손에 쥐어져 있었으면 했다.




제노와 절친인 허스키 형이라고 한다. 저 형에 비하면 아직도 제노는 어딘가 앳되어 보인다.


 애견학교 소장님에게 '제노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 잘 뛰어놀고 기운이  넘쳐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활기 터지는 제노의 사진들이 주르륵 도착할 때면 '네가 아빠 없이도 그렇게 잘 지낸단 말이지? 앙?!'과 같은 일말의 배신감(?)을 느끼다가도 마치  제삼자인 양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곤 제노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예정보다 늦게 태어난 공주님을 영접하고 이런저런 뒤치다꺼리를 하고 나니 첫 면회를 갈 수 있었던 건 제노가 애견학교에 들어간 지 약 한 달이 지난 무렵이었다.


아빠랑 항상 이러고 살았는데,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제노에게 줄 간식과 장난감, 예방약들을 주섬주섬 챙겨 향하는 길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던 건 처음인데, 만약에 녀석이 날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그럴 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녀석의 맹~한 눈빛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세계를 감안하자면 0.1% 정도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견학교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단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제노가 나를 잊은 것은 아닐까 품었던 일말의 걱정은 이제껏 인생에서 떠올린 가장 멍청하고 무례한 생각이었음을 시인하고 반성해야 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떤 잘생긴 흰 개와 눈이 마주쳤다.


 차에서 내린 순간, 우두커니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 기분은 지금도 형언하기가 어렵다.


제노를 데려오던 날, 얌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앉아있던 아가 제노

처음 제노를 입양하러 가던 날, 모든 강아지들이 다 밥을 달라고 난리를 피우던 북새통 중에도 제노는 혼자 얌전히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과 주고받는 시선 밖의 세상이 모두 멈춰버린 것 같았던 순간을, 다시금 느낀 것이었다.


 동물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운명이 엮인 존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진지하게 들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본 제노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난리 버거지를 피우며 펜스 위로 올라타기 시작한 것은 바로 다음 순간부터였다. 이제껏 함께 하며 단 한 차례도 들어본 적 없는 돌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제노로 인해 온 애견학교의 다른 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흥분해서 함께 짖어댈 정도였다.


어찌나 흥분해서 펜스 위로 자기를 예뻐해달라고, 왜 이제 왔냐고 난리였는지 !


 

그래그래그래 - 아빠 잡아 먹것다 이눔아! 제노 미안해 ㅠ ㅠ


 눈물이 핑 돌았다. 알아볼 수야 있다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기다리고, 또 반겨줄 줄은 몰랐다. 자신을 떨어뜨려놓아 서운할 법도 한데, 반려견의 마음에는 사소한 서운함보다도 순수한 사랑과 애정이 압도적으로 넘쳐난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무조건적인 사랑'.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라고 하지만 글쎄,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함께하는 가족을 향한 반려견의 애정을 나타내기에 더욱 적합한 말이 아닐까.




제노는 엄청나게 건강해져 있었다. 몸매부터가 달랐다.

예전에는 산책 중에 '토실토실하다'거나 '살 많이 쪘네요~' 하는 분들이 있었다. 나름대로 몸매와 식단 관리를 해 주는 편이었는데도 아무래도 애정이 넘치는(?) 삶 속에서 제노는 애교살집을 지닌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드럼통....?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제노는 캠프에서 남자다운 역삼각형 근육질로 변해 있었다. 스크래치 하나 없었던 검은 코에는 다른 개들과 놀다 긁힌 상처가 남자답게(?) 늘어 있었다. 제노 엄마는 속상해하지만 나는 그렇게 다른 존재들과의 거리를 재는 방법을 터득해 가는 것이라 믿기에 오히려 대견하게 느껴졌다.

조금은 꼬질꼬질하지만 건강미가 넘친다!


 우리는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뛰놀았다. 처음으로 목줄을 착용하지 않은 제노와 뛰놀며 깨달은 사실이 여럿 있다.


1. 녀석은 도심에서 절대로, 절대로 목줄 없이 다닐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이리 오라는 말도, 저리 가라는 말도 안 듣는다. (물론 목줄 없이 다닐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결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 아빠와의 산책에서 달리기는 제노가 완전히 봐준 거였다.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르다. 내 주위를 빙글빙글 달리는데 눈으로 녀석을 좇기에도 바쁘고 어지러울 정도였으니..


3. 면회를 간 날은 영하 10도였다. 제노는 더워 보였다.


4. 풀과 흙 위에서 생활하면 도시 생활로 단단하게 굳어진 제노의 발바닥이 다시 폭신폭신하게 변한다.


5. 가족을  잊기는커녕, 너무나도 똑똑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

일부러 제노와 작별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도저히 녀석을 뒤로 하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또 오겠다고 어루만져준 다음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차에 돌아와 힐끗 녀석이 있는 펜스 쪽을 바라보고는 애견 학교 전체 전경을 사진에 담고 운전석에 올랐다.


일부러 최대한 녀석을 쳐다보지 않고, 소장님과 다른 이야기를 나누면서 애써 돌아가서 할 일들만을 떠올리며 서둘러 애견학교를 떠났다. 그리고 좀 전에 찍은 사진을 열어보니, 아주 작게 찍힌 하얀색 형체가 내가 있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너무 멀어서 작게 나왔지만,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나중에 소장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지난번에 제노 아빠 왔다 가신 뒤에도 한참 낑낑대면서 아빠를 찾더라고....




우리 제노는 참 밝은 아이다. 세상에 싫은 것도 없고, 딱히  두려워하는 것도 없는 철부지 명랑덩어리.


아빠가 떠난 뒤에도, 엄마와 아빠가 함께 찾아왔다 떠난 뒤에도 잠깐 낑낑거리다가 금방 다른 개들과 뛰놀고 간식을 향해 돌진하며 행복하게 지내는 녀석이다. 서운함도, 섭섭함도, 누군가를 향한 원망도 없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순수하고 해맑은 애정 덩어리라서 아빠는 제노에게 더 많이 미안하다.


아빠 품에서,
아빠 품에서,
아빠 품에서,




 제노가 오기까지, 이제 나흘 남았다.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고 실제로도 여러 준비가 필요하다.

운동도 열심히 함께 해야 할 테고, 조심스럽게 새로운 가족과 적응할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하나씩 따뜻하게 풀어가는 것이야말로 바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아닐까.

제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집 털북숭이 첫째 아들이니까.


앞으로도 항상. 아빠 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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