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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Mar 08. 2016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IX

'백설'


 얼마 전, 서울에 큰 눈이 내렸다.


 쌓일 것 같지 않았던 눈발은 시간이 갈수록 굵어져 갔고 이내 창밖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했다. 우리 집에서 기르는 흰 멧돼지는 밖에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 산책 때가 된 줄 알고 홀로 흥분해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야.... 아빠 좀 앉자..


 악천후가 찾아올 때면 오늘은 또 산책을 어떻게 시키나 하는 걱정으로 가득 해지는 것이... 이게 바로 뱃사람의 마음가짐이구나 싶다. 우리 철없는 털북숭이 아들은 워낙에 두터운 옷을 장착하고 태어난지라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몸만 조금 흔들어대면 그럭저럭 원상태로 돌아온다. 물론 비를 너무 많이 맞으면 쉽게 수분이 배출이나 증발될 수 없는 모질 구조이기에 저체온증의 위험도 있다. 아마 녀석이 산책하다가 저체온증에 걸릴 즈음엔 나는 아마 어딘가에 떠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야생동물들에 비해 인간은 이다지도 나약하고 헐벗은 존재다.


 눈 오는 날의 산책은 여러 준비가 필요하다.


1. 힘센 제노를 데리고 눈길이나 빙판을 걸으려면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는 부츠를 신어야 끌려가거나 미끄러지지 않는다. 방수 부츠를 신었다.


2. 눈을 너무 많이 맞을 수는 없으니 후드 티셔츠와 모자, 두툼한 방한복을 챙겨야 한다. 우산? 한 손으로 우산 들고 나머지 한 손만으로 무난하게 허스키를 산책시킬 수 있는 건 나무꾼이나 대장장이 정도일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최근 제노와 함께 공원에 갔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한 손으로 우산을 펴 들고 나머지 손으로 제노를 끌고 돌아온 적이 다. 아마 그 광경을 본 분들만이 진실을 알 것이다. 어떤 남자가 우산을 쓴 채로 흰 멧돼지에게 끌려가고 있었다고...


3. 마음의 준비. 눈은 점심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내 마음의 준비도 시작되었다. 어떻게 씻기지? 산책 코스는? 배변 장소가 눈으로 뒤덮여 제대로 기억하려나? '아, 정말 그냥 혼자 놀다 오라고 보냈다가 두어 시간쯤 뒤에 돌아와서 벨 누르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이겨내야 한다. 결국 나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제노와 시베리아로 산책을 떠났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답게 막상 밖으로 나가니 날이 포근했다. 제노와 눈 오는 날 산책을 하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이전의 산책들에선 눈발이 아주 잠시 흩날리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주로 제노와 산책을 많이 시절은 한여름이었다. 시베리안 허스키를 데리고 한여름밤을 달리다 보면 여러 생각이 들었다. 존재에 대한 의문이라든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오히려 근본적인 의문들이었다. 그만큼 무덥고 괴로웠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밤 열대야를 달렸다. 녀석의 숨이 주둥이까지 차 오를 정도로, 땀에 젖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로 지쳐서 집에 돌아와 제노에겐 얼음을 먹이고, 찬 음료를 마시고, 선풍기를 틀어주고, 샤워를 하고 나오면 그 기분은 한여름에 과연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상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선풍기 앞에 드러누워 헥헥대며 잠들어 있는 뽀송뽀송한 털 아들, 땀을 쫙 빼고 돌아와 찬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와 녀석을 어루만져주면 비로소 오늘 하루도 평화로이 지나가는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한여름 산책에 지친 김제노와 아빠


 눈이 제대로 내리고 있었다. 제노가 애견 학교에 가 있는 동안 크게 눈이 온 적이 다. '오늘 같은 날 제노랑 산책을 해야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던 차에 애견 학교 소장님께 연락을 받았다. "제노가 눈 내리는 걸 처음 봤나 봅니다. 처음엔 놀라서 흠칫거리더니 이젠 미친 듯이 좋아하면서 뛰어노네요!"


 냉소적으로 이야기를 풀어왔지만, 사실 녀석과의 첫 눈밭 산책이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 곳에서 살아왔던 녀석들이니까.



 

 우리는 거의 두 시간 동안 눈 내리는 도심에서의 산책을 즐겼다. 이에 대해선 굳이 미주알고주알 긴 설명을 하지 않으려 한다.


눈이 오거나 말거나 늘 산책에서 하는 행동은 똑같다. '온 데 다 참견하기'


눈만큼 흴 줄 알았는데 막상 눈 위에 데려다 놓으니 그냥 누렁이
코에 눈뭉치 붙이는 중..
거기 루돌프라도 있니
시베리안 허스키 인 시베리아
눈에 별로 관심 없는 척 하면서 산책 내내 쿨하게 눈을 계속 핥아먹었다.
실제론 이렇게 예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한 장 건졌다.
제노는 정말 아무 생각 없는데도 깊이 사색하는 것처럼 보이는 외모를 가졌다
역시 실은 아무 생각 없다. 옆모습 라인에 속으면 안 된다.
멀리 있으니 이제 좀 시베리안 같구나!




 눈도 많이 내리고 날도 추울 것 같아서인지 공원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둘이서만 노는 공간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그곳에 쌓인 눈은 전혀 발자국이 남아 있거나 누군가가 어지럽히지 않았을 것 같았다. 눈밭은 새햐얗고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제노가 먼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고 나는 녀석을 쫓았다.


혹시 주변에 누가 있나 해서 돌아보는 순간, 가슴 뭉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바로 제노와 나, 둘이 걸은 발자국이었다. 우리가 함께 걸어온 길의 흔적이었다.




제노 이야기가 브런치에 연재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인 중 하나가 물었다. 무슨 이유로 제노 이야기를 브런치에 연재하느냐고. 시간도 많이 들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귀찮지 않냐고. 물론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엄연히 업무도 있고, 육아 중데다가, 적지 않은 분량을 매 회 적어나가고 또 이를 위해 허스키와 반려견에 대한 여러 공부나 자료 조사를 해야 하기에. 그리고 새벽과 저녁마다 꼬박 한 시간씩 제노와 밖을 달리고 돌아와야 하기에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다만 이 작업의 출발점과 내 마음은 근본적으로 조금 다르다.


 흰 눈 위에 남은 우리 발자국처럼, 이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이야기는 제노라는 시베리안 허스키가 이 세상에 있다는, 그리고 있었다는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아빠이자 반려인의 마음이다. 반려견의 일생은 잔혹할 정도로 짧다. 특히나 덩치가 있는 제노같은 녀석들일수록 무병장수해야 15~17년 정도가 한계다. 나는 제노가 예쁘고 순수한 시베리안 허스키로, 그리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았던 시베리안 허스키로 기억되길 바란다.


 제노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시베리안 허스키의 매력을 알아가고, 어떻게 다루고 또 케어해주어야 할지 알게 되어 더 많은 녀석들이 행복해지고 그로부터 가족들도 더욱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고 훗날 누군가가 시베리안 허스키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새로운 가족으로 들이려 할 때 제노의 이야기가 참고가 될 수 있다면. 이름은 기억되지 못할지언정 그렇게 예쁘고 착한 은빛 허스키가 있었다고 누군가의 뇌리에 남을 수 있다면.


그렇게 제노의 짧고 순수한 삶이 이 세상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것 아니겠냐고, 나는 그렇게 답했다.




우리 털북숭이 아들 제노, 항상 아빠가 뒤에 있을게.







멜랑꼴리할 필요 없다. 제노와 함께 순백의 들판을 이렇게 만들고 돌아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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