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한 개비 성냥을 슬쩍 긋는 행위 하나가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삶의 주체들이 이른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개인의 삶에 있어 단 한 차례 있을 법한 거대한 사건도 열 발짝 뒤로 물러난 채 다시 바라보면 모두에게 일어날 법한 개연적인 사건인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큰 흐름 속에서의 삶이자 우리가 몸 담고 살아가는 '세계(世界)'의 가장 적나라한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 글에서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한 마리를 품었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여기서 감상적인 부분을 제거하면 "개를 기르기 시작했다."는 말 뿐이 되지 않는다. 다만 주목할 점은 '모두의 세계'라는 그림에서 그저 개를 기르는 행위였던 것이 '나의 세계'로 들어오자 한 생명을 따뜻하게 품는다는 의미와 더불어 삶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다.
지금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관계와 인연이 시작되기 전 내 삶은 마치 한 방향으로 놓여 있는 전구의 불빛 같았다. 나침반의 방위 0도, 방향은 잡았지만 어쩐지 적당히 한 방향을 향해 퍼져 있는 방사체였달까.
결혼을 통해 삶의 방향이 시계방향으로 60도 회전했다. 혼자인 무렵에 비해 많은 것이 변하긴 했지만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다(당시엔 모든 게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삶에서 '가정'이라는 것이 생겼다는 사실은 방사형 전구빛이나 야자수 사이에 널려 있는 해먹 같았던 내 삶의 방향을 '촛대 전구' 정도로 압축시켜주었다.
제노를 가족으로 맞이하겠다는 결정은 나와 제노 엄마의 삶을 시계방향으로 120도 더 돌려놓았다. 우리는 비로소 부모나 보호자로서의 책임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인지, 털북숭이 가족과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현실적인 삶을 제약하는 동시에 심정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주는지를 깨달았다. 60+120이니 180도. 자연스럽게 삶의 방향은 정반대로 향해 있었다. 딱히 새로운 것을 향할 여유도 동기도 부족했다. 그저 새로운 가족과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것만으로도 삶이 벅찼다. 촛대 전구는 반대 방향을 가리키면서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평화와 안정 속에 굳이 켜져 있을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 아닐까.
그러던 중 햇살 같은 공주님이 태어났다. 삶은 180도(180도인지 540도인지 잘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변했다. 기울어지고 뒤집어지고 다시 뒤집어져 결국 처음 바라보던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육아, 육견에 한참을 시달리고 난 얼마 전이었다. 삶은 더 이상 방사형 전구가 아닌 레이저 광선처럼 처음 바라보던 어딘가를 향해 곧장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늘 바라보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젠 곁에 제노 엄마와, 제노와, 햇살 공주님이 함께 있다. 이중 단 한 존재라도 없었다면 정확히 0도의 오차도 없이 처음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는 현재 Ossian이라는 필명을 달고 있는 사람의 방향, 그 3분의 1인 120도를 돌려놓은 거대하고 북실북실한 존재에 대한 기록이었다.
이때까지 제노의 이야기가 실린 모든 페이지를 발견하거나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보이는 대로, 때로는 지인들이 보내주는 대로 열심히 그 기록을 스크린샷으로 스크랩해두었다. 글쎄, 다른 글은 어딘가에 실려도 스크랩할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제노 녀석의 얼굴이나 몸뚱이가 어딘가에 등장할 때면 어쩐지 너무나 기뻐서 곧바로 저장을 하고 말았다.
제노는 참 사랑을 많이 받았다. 가장 기쁜 것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앞으로도 제노가 우리 가족을 제외한 세상에서도 기억될 것이란 사실이다.
녀석의 귀여운 외모와 희소함 덕분에 타 작가님들이나 전문가분들에 비해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글들이 호사스럽고 과분한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에 얼굴부터 달아오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마구잡이식 구성에 최악의 필살기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써 내려간 문장이나 표현도 많아서 오래도록 기록이 남을 곳에 지나치게 무성의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든다.
브런치라는 앱을 처음 접했을 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개인 기록장처럼 아무 글이나 휘갈겨야 하는지, 아니면 제대로 된 문학이나 기고문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감도, 전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내 발치에 엎드려 잠들어 있던 것이 바로 제노였다.
악마의 이갈이 시즌이 끝나고 겨우겨우 산책과 일상생활의 리듬을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간의 고생에 너무나도 지쳐 있었던 나는 큰 개를 키우는 고충을 하소연하는 심정으로, 브런치라는 공간을 일종의 대나무 숲이라 여기고 두서없이 마구 외쳐대기 시작했다. 바로 그 결과가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였다.
마구잡이로 소리를 쳐대다 보니 어느 순간 제노를 사랑해주는 분들이 생겼고, 별다른 유익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음에도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주는 분들이 생겨났다.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약간은 무섭기도 하고. 제노의 삶과 존재에 대한 많은 분들의 관심과 애정, 기다림이 순수하디 순수한 녀석에 대한 세상의 무한한 긍정처럼 느껴져 진심으로 기뻤다.
이번 '세계'편을 통해 어느덧 제노의 이야기도 21번째에 이르렀다. 처음엔 한 다섯 편 정도 쓸 수 있으면 많이 쓰는 거겠구나, 생각했다.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를 연재하는 기간에는 일주일에 두 차례씩 편집, 기고해야 하는 죽음의 칼럼 작업 스케쥴도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출산까지 겹쳤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작년 10월 즈음 마무리지으려 했던 이야기가 많은 독자분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여기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와 내용을 다루고 싶고, 또 공유하고 싶은 감상이나 즐거움들도 있지만 이 즈음해서 잠시 쉬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아빠, 오늘은 산책 언제 나가요? 간식은요?' 물음이 담긴 눈빛으로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제노 녀석을 바라보면서, '이번엔 또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써야 할까,' '너의 흥미로운 부분을 새로이 파악해야 또 다음 글을 쓸 텐데'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는 내게 있어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이야기'의 제 1 부가 막을 내릴 순간이라는 경종, 마지막 한 바퀴임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녀석을 바라보면서 어떤 다른 것을 만들어낼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러한 행위가 순수한 즐거움이나 이야기의 공유가 아닌 어떤 의무감에 의한 것이라는 일말의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산책은 30분 뒤에, 햇살이 분유 타 주고 나갈 거야." , "오늘 간식은 남태평양 황다랑어를 말린 육포 조각이야. 알래스카 연어 육포는 네가 어제 다 먹었잖니." 순수하게 올려다보는 아이를 순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빠라면 다른 생각 대신 곧바로 이렇게 답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제노 엄마도 그러한 나의 의견에 당신답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잠시간의 '우리만의 시간'을 가지고 더 따뜻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제 2 부]로 돌아올 예정이다. 이제까지 다룬 1부의 이야기가 '아가 제노 이야기'였다면 '젊은 청년 제노' 이야기가 2부의 내용이 아닐까. 또한 사진 및 동영상으로 주로 구성된 에필로그,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특별편 3부작]을 이미 구상해 둔 바 있어 제노의 모습은 앞으로도 심심찮게 등장할 것이다.
작년 7월 11일에 첫 기록을 시작으로 장장 10개월간 연재된 본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이야기 제 1 부]를 사랑해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하며 본편의 마지막 글을 매듭짓고자 한다. 나는 이 글을 마치면 곧바로 제노의 새로운 사료 봉지를 뜯어 관절 사료와 섞은 다음, 배변 봉투를 정리하고 녀석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목덜미와 등을 쓰다듬으며 잠시 낮잠을 청할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만의 시간'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매거진 다음 글 예고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특별편 ⅰ : 잠든 모습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특별편 ⅱ : '한 눈에 보는 성장기'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특별편 ⅲ : '달려라 김제노'
특별편ⅳ : 바보(Pabo) 이야기 : '어느 날 갑자기 날아든 아프리카 회색 앵무새(Gray Parr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