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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Dec 14. 2016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특별편ⅱ : 언제나,


 산책을 자주 나가는 제노에겐 친구가 많다. 몰티즈, 비숑프리제, 시츄 등 자그마한 친구들부터 골든 레트리버, 래브라도, 말라뮤트 등 덩치가 큰 친구들까지 두루두루 잘 지내고 뛰논다. 이제 생후 갓 4~5개월이 되어 야외 산책을 시작한 친구서부터 14~15살이 넘어가는 할머니 할아버지급의 친구들도 많다. 제노는 이제 갓 두 살. 아직도 호기심과 에너지가 넘치고 조금만 운동이 부족하면 좀이 쑤셔 견디지 못하는 열혈 소년이다. 


 처음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산책 시간이 자주 겹쳐 하루에 한두 차례는 꼭 마주치는 녀석이 있었다. 외국인 할아버지가 하루 세 번, 그 아내분이 하루 한 번  산책을 시키는 새카맣고 자그마한 덩치의 아이였다. 처음엔 마주칠 때마다 하도 녀석이 제노를 보고 사납게 굴어대서 따로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동선이 겹칠 것 같으면 굳이 둘을 붙여놓지 않고 빙 둘러서 산책을 다니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녀석의 이름은 페퍼(Pepper)였다. 모나고 매운 고추같은 성격이라는 이유였다. 강아지로만 보였지만 알고 보니 무려 만 13년을 넘긴 할머니견이었다. 큰 개를 키우다 보면 작은 개들은 모두 어릴 것 같다는 착각을 하며 살곤 한다. 알고 보면 제노보다 두 배 세 배 심지어는 다섯 배씩 더 산 녀석들인데 말이다. 




 

틈만 나면 아빠 발 위에서 잠을 청한다


 오랜만에 작성하는 제노 이야기에 굳이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페퍼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얼마 전 페퍼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오전에 실컷 운동을 한 제노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사이 나와 제노 엄마, 그리고 딸내미인 햇살이 셋이서 잠시 장을 보러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하주차장에 들어서자 페퍼의 견주인 할아버지가 차 트렁크 뒤에서 장본 짐을 꺼내는 것 마냥 열심히 작업 중이셔서, 주차를 마치고 올라가는 길에 인사를 건넸다. 페퍼는 잘 지내고 있느냐고. 사실 이틀 전 아침 산책 중에 페퍼와 할머니를 만나 인사를 나눈 터였다. 


 페퍼는 잘 지내고 있냐는 내 질문에 할아버지는 카트에 담긴 검은 비닐을 가리키며, "방금 페퍼가 죽었어요. 그래서 지금 화장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녀석의 몸뚱이를 잘 추슬러주려고 이렇게 얼음을 잔뜩 가져와서 감싸주는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아무런 전조 증상도 없었는데, 산책을 하다가 잠시 쓰러지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할아버지는 짤막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살다 보면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나는 법이죠.(Well, in life, these things happen..)" 




강과 제노 - 친구를 생각하는걸까?


 분명 '어버버버'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제노 엄마의 말을 들어보니 나는 차분하게 위로의 말을 잘 전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담담하게 내어놓는 문장 하나하나를 들으며 점점 머릿속이 새하얘졌던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엔 방긋거리며 웃던 돌쟁이 딸내미도 어른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심각한 표정,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오후 산책을 하던 페퍼는 뛰놀던 중 잠시 쓰러지더니 의식을 잃었다가 15분쯤 뒤에 깨어났고,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픽 쓰러져 잠이 들더니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고 한다. 수의사 말로는 흔치 않은 사례이지만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다. 


 페퍼는 화장 절차를 밟았고, 유골은 고향인 미국으로 보내졌다. 페퍼의 견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미 페퍼의 빈자리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서 유골단지까지 집에 두지는 못하겠더라며, 새로 유기견을 입양해 기를 생각이긴 하지만 아직 실행에 옮길 마음까지는 들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제노와 저녁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오전에 강렬한 조깅을 했던 터라 가볍게 뛰고 집에 돌아가려는데 이상하게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뛰어 돌아가기로 했다. 직선주로가 끝나고 집으로 방향을 트는 순간, 손을 맞잡고 걸어오시는 페퍼 할아버지, 할머니와 딱 마주쳤다. 덕분에 나는 다시 한번 진심으로 깊은 위로의 마음과 애도를 전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하루에 세 차례, 할머니는 한 차례 길게 페퍼의 산책을 다니셨는데 두 분 다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져 저녁 무렵에야 처음으로 함께 손잡고 산책을 나오신 것이라 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루한 나머지 잔디를 뜯어먹기 시작한 멧돼지 제노 때문에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여전히 손을 맞잡고 나란히, 페퍼와 함께 걷던 길을 걸어가고 계셨다. 


 글쎄, 차가운 바람이 강한 날이어서 약간 눈앞이 흐려졌던 것인지, 코끝이 시큰했던 것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왠지 그 둘의 뒤를, 작고 검은 강아지 한 마리가 졸졸 쫓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잔디를 뜯던 제노와 함께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잠시 대화를 위해 목에 걸쳐 두었던 헤드폰을 머리에 올려 끼고 일시정지해둔 음악 재생 버튼을 다시 눌렀다. 흘러나온 곡에 나는 망치를 얻어맞은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제노는 갸우뚱하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흘러나온 음악은 Charlie Puth의 See you again 이라는 곡이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폴 워커를 추모하는 곡으로 분노의 질주 7편 엔딩에 삽입된 곡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가사를 담고 있는 곡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공원 한 바퀴를 더 뛰고 싶었던 것도, 뛰면서 다른 강아지들이 있었음에도 공원 끝까지 제노를 멈추지 않고 전력 질주한 것도, 그래서 노부부와 마주친 것도, 그들과 헤어지고 듣던 음악을 재생하자 그런 곡이 흘러나온 것도, 글쎄, 굳이 우연이라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페퍼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세상에는 그런 일들도 일어나듯, 때때로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기적처럼 느껴지는 사소한 순간들도 있는 법이니까. 


 페퍼의 소식을 접한 제노 엄마와 나는 앞으로 더욱 따뜻하고 정성을 다해 제노를 사랑해주고 예뻐해 줄 것이라 다짐했다. 그럼에도 제노는 오늘도 틈만 나면 혼나고 있다. 저누무시키 이누무시키, 하면서. 


아마, 앞으로도, 언제나,


페퍼,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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