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이윽고 삶이 갈래로 나뉘는 분기分岐가 찾아온다. 그저 계속 바람을 따라 흘러가는 길이 있는 반면 버티고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필요로 하는 길이 있다. 어느 쪽이 옳은가에 대한 답은 자신에게 지키고자 하는 것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얻거나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힘은 뚝심이라고도 말하는 의지라 생각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바쳐낸다면, 모든 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면, 그리하여 모두가 웃을 수 있다면'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쟁취할 수 있고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순수했다.
순수함이 그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옳았다. 다만 우리가 몸 담고 살아가는 세상, 현실이라는 곳은 옳은 일들로만 엮인 직물이 아닐 따름이었다. 선과 악, 정의와 부정, 이상과 현실이라는 양극이 지나치게 뒤엉켜 일견 표면이 매끄러운 듯한 착각을 심어주는 곳이 바로 현실이었다.
무언가를 지킨다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신념, 사랑, 이념, 소중한 그 무엇을 지킨다는 일은 아름답고도 숭고한 일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지킬 만큼 소중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 자체가 축복이며, 이를 지키는 행위는 응당 따르는 책무와도 같은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신념을 지켜낸다는 삶. 사랑을 보전하는 삶. 이념을 구축하는 삶. 그러한 삶을 살아가리라 굳게 다짐하고, 또 실제로 실천함을 믿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잠시 뒤를 돌아볼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지나 온 길의 자취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충격적인 사실이 보였다.
무언가를 지켜내는 삶이란, 최우선 순위에 둔 소중한 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하나씩 버리거나 제거해나가는 삶이었다.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지키리라 마음먹은 가치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긴 시간을 들여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면 나머지 일들에 소홀하게 된다는 명제. 기계가 아니기에 완벽하게 무게중심을 분배하여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다만 다소 지나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약간의 우려가 들 정도로, 지난 시간은 온전한 투신投身이었다. 올바른 삶이었을까?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했다. 앞날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므로.
결론은 이랬다. 눈에 보이는 결과는 잠시 밀어두어도 지난 10년간 어느 순간으로도 되돌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이제껏 내려온 선택과 길들에 일말의 후회도 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된 것이라고.
지킨다는 것은 무언가를 지켜내는 것보다 훨씬 많은 다른 무언가들에 작별을 고하는 일을 말한다. 그것이 신념이라면 수많은 다른 철학과 신념 체계를 밀어내며 때로는 '아집'이라는 비판에도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즐비한 유혹과 현실의 불확실성에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념이라면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을 압도하거나 포용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기 위해 길고 깊은 여정을 마쳐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인연이라면 소중하다 여기는 연緣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겉치레 인연들을 털어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는 꿈을 좇는 자가 견디어 내야 할 무게 인지도 모른다.
꿈을 꾼다는 것은 내면의 가장 강렬한 열망을 지켜낸다는 것과 같다. 꿈을 지켜내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망을 놓지 않는 끈기나 정신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은 꿈과 관련 없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일이 아닐까. 버리고, 무관심해져야 비로소 진정 소중한 것에 온전히 몰두하고 헌신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니까.
말은 골치 아프게 하지만. 무언가 그럴듯한 바를 깨달은 듯 말하지만. 주변엔 아직 버려야 할 것들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한편 미련, 집착, 추억, 가벼운 무언가가 전혀 없는 삶도 지나치게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꿈이나 제 1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무료하고 나른한 시간을 보낼 여유도, 다이어트라는 목표와 무관하게 감자칩을 아삭 댈 방종도 필요한 것이 또 삶의 매력이니까.
삽화 : Cover . Andrew Wyeth 作 / ⅰ. Zaria Forman 作 / ⅱ. Seth 作 / ⅲ. Evgeny Lushpin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