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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소영 Oct 02. 2023

비 온 뒤 맑음, 오히려 좋아

욕구 명상 Day 008. 휴식

 작년 9월 30일을 기억한다. 아침 일찍 배달된 희소코치님의 연재글로 하루를 열고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글을 썼던 아침. 올해 9월 마지막날은 매우 달랐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계획이 다 무엇이냐, 그저 되는대로 맡기면 될 일, 내어 맡긴 하루. 


 9월의 마지막날, 욕구 명상에 '휴식'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날의 축하 첫 줄에 적었다.

 '자연 속으로 휴식하러 간다!'


 7년 만의 파주 나들이, 그때와 같은 이유로 골랐다. 추석연휴라 길이 막힐 테니 멀지 않으면서 평소에 잘 가지 못하는 지역을 가보자. 그렇게 남편과 정오를 넘긴 시간에 출발했는데, 길은 생각보다 막혔고 추석날은 그렇게도 쨍하던 날씨가 무색하게 흐린 날이었다. '뭐 어때, 비 오는 날의 드라이브도 좋지' 했지만, 마음 구석 한켠의 '이런 날은 집에 있을 걸' 하는 생각을 넣어두느라 애썼다.

 다행히 서울과 일산의 경계부터 길이 풀리나 싶더니, 난데없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어찌나 거세게 오는지 와이퍼가 아무리 분주하게 움직여도 금방 비가 가득 흘러내렸다. 겨우 시야를 확보하며 거북이 운전을 하며 가는데 옆 차선의 차가 쌩하며 지나갔고, 몇 초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빗물이 앞유리를 가득 채웠다. 평소 운전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때의 느낌과 들었던 생각이 선명하게 남았다. 남편도 나도 잔뜩 긴장한 채로 빗길을 뚫고 가다 보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해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점심식사를 위한 식당이었다. 한산하기만 했던 동네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 들어찬 큰 식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목표로 한 식당도 주차할 곳도 없고 대기가 무려 88팀! 1시간 반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어쩌지 하다, 일단 차부터 대자하고 주차장이 넓길래 차를 세워뒀던 카페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오히려 좋아!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카페였지만 나무, 꽃, 연못 등 푸르름이 가득한 곳이었다. 마침 비가 그쳤다고 야외의 좌석들을 닦고 계셨고, 우린 연못 바로 앞자리에 자리 잡았다. 비 온 뒤의 습기를 머금은 공기, 연못 작은 분수의 물소리와 함께 하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졌다.

 지금쯤이면 대기가 줄었을까 다시 식당으로 걸어 내려오면서 보니, 아까는 보지 못했던 꽃들이 피어있는 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대기 끝에 처음 맛본 도토리국수와 도토리전, 쫄깃한 식감이 별미였다. 배부르지만 더부룩하지 않은, 뭔가 건강한 식사를 했다는 만족감과 함께 근처 미술관으로 향했다.


 9월 초 <무경계> 스터디 첫 시간에 함께 나눴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듣던 대로 입장하기 전 미술관 건물의 외관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기념사진을 남기고 들어섰는데, 추천받았던 김찬송 작가님의 전시는 이미 끝나고 27일부터 새로운 전시를 하고 있었다. 어쩌지 하다가 '워터스케이프'라는 단어에 꽂혀서 보기로 했다.

 아쉬움도 잠시, 오히려 좋아! 얼마 전 욕구명상에서도 만난 '물'이었기에 뭔가 더 가깝게 느껴졌고, 그림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색감들이 가득했다. 한가위에 어울리는 달처럼 보이는 작품들도 신비로웠다. 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영상도 있었는데, 색을 채우고 물로 지우며 그려가는 방식이 나에겐 매우 새로웠다. 위층의 다른 전시도 관람하고 내려오면서 다시 한번 송창애 작가님의 워터스케이프 그림들을 둘러본 후, 나오는 길엔 한 손엔 내가 좋아하는 노트를 사서 들고 다른 손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MIMESIS SE 18 The Opposite Site송창애 개인전

  

 오후 5시를 넘긴 애매한 시간이었다. 파주 나들이를 하루 앞두고 일산/파주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애정하는 언니에게 몇 곳을 추천받았는데, 그중 '콩치노콩크리트'가 있었다. 7시에 문을 닫는다고 알고 있었기에 입장료를 생각하면 가격대비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짧기도 했고, 서해 근처에 온 김에 자연 속에서 노을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도착하니 이 시간에도 의외로 사람이 많은지 만차였고, 한강과 임진강의 경계까지 왔는데 지금 아니면 또 언제 하는 생각으로 고민을 접고 입장했다.

 그런데 들어간 순간, 오히려 좋아! 이곳이 바로 노을 명당이었다. 구석구석 자연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자리들이 있다기에 둘러봤는데, 층마다 한 면의 창은 강 넘어 북한을 배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역시나 그 창가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근처에 앉아 기다리다 보니 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웅장한 사운드로 음악을 들으며 낯선 풍경 너머의 노을을 바라보는 시간, 이 역시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해가 지면서 사람들도 조금씩 빠져서 꽉 차 있을 때 보다 여유가 느껴졌고, 문을 닫을 시간 즈음엔 사장님께서 추석연휴에 꼭 들려주고 싶으셨다는 월광도 감상했다.

콩치노콩크리스에서 음악과 함께 감상한 노을

 

 어느새 어두컴컴해지고 저물어 가는 하루, 마지막으로 추억의 헤이리 산책에 나섰다. 이미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은 시간이었지만, 중간중간 불 켜진 곳들을 구경하며 걷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아프리카와 터키 등에서 넘어온 장식품들을 파는 가게에서, 비폭력대화의 상징인 기린을 잔뜩 만나 반갑기도 했고.

 그리고 저녁 메뉴로는 역시나 처음 먹어보는 어죽! '나혼자산다'에서 김대호가 먹었던 메뉴인데, 같은 식당은 아니지만 어죽을 신기하게 봤던 남편이 찾은 식당이었다. 마감시간에 가까워서 가니 많이 기다리지 않을 수 있어 이 또한 오히려 좋았다.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의 저녁식사로 딱인 메뉴였다.

 올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뚫린 길을 달려 동네에 와서 마지막 코스로 문 닫기 15분 전의 이마트에 들렀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브랜드 잔을 주는 행사가 너무 많아서 고르고 고르다 두 손 가득 캔맥주세트를 여러 박스 사들고 나오는데, 뭔가 행복했다.  


휴식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 진정한 휴식을 맞이하나요?
내 휴식장소는 어디인가요?
내게 쉼이 되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 <오늘의 나를 안아주세요> p.48


 나에게 휴식은 정해진 것 없이 몸과 마음이 따르는 대로 보낼 수 있는 자유로운&여유로운 시간을 갖는 것, 그리고 자연 속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계획형 부부가 딱 짜인 계획 없이 추천과 검색, 그리고 직관 한 스푼으로 채운 하루.

 의도하지 않았는데, 내어 맡김으로써 그런 휴식을 가진 하루였다.


있는 그대로 내맡기십시오.
삶에게 '네'라고 말하십시오.
그제야 삶은 당신을 거역하지 않고
당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by 에크하르트 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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