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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Mar 20. 2020

물건의 기억

나의 물건은 우쿨렐레이고 싶다

꽤 오랫동안 애정을 쏟았던 우쿨렐레를 한동안 구석에 치워두고 살았다. 그러다가 며칠 전부터 눈에 띄어 다시 만지기 시작했다. 까먹었던 코드를 기억해내고 스트록과 아르페지오 주법을 일깨우려 하는 중이다. 한때를 나를 지탱해주었던, 잊고 지낸 물건에게서 소확행을 꺼내려고 다.




'그 사람의 냄새'가 나는 물건이 있다.


초등학교 1, 2학년 정도 되었을까, 엄마가 입던 빨간색 조끼가 그렇다. 굵은 실로 촘촘하게  선명한 빨강 조끼, 어릴 적 앨범을 뒤져보면 한 장의 사진에 선명하게 존재한다. 뒷마당 빨랫줄에 큰 꽃무늬가 그려진 담요가 널려 있고, 그 앞에 형과 엄마와 내가 나란히 서있는데,  빨간 조끼가 들어있다. 그 조끼와 연결되어 장롱 안 바구니에 빨간색 털실 뭉치도 따라다닌다.
그때는 몰랐지만, 빨간 조끼를 입는 날은 엄마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서울 계신 외할머니 댁에 갈 때, 가족사진을 찍을 때, 학교에 찾아왔을 때, 엄마는 그 조끼를 입고 계셨다.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된 엄마의 물건이다.


더블캡이라는 화물 자동차가 있다. 국내 K자동차 회사에서 만든 1톤 트럭으로, 일반 트럭의 모양이지만 사람이 타는 좌석이 두줄인  특징이다. 노동일을 하시던 아버지의 직업과 우리 네 가족을 위한 최적의 모델이었다. 자대 배치를 받고 처음으로 외박 간 날, 그때의 파란 더블캡 자동차를  잊을 수 없다. 각 잡힌 군복과 반짝거리는 군화를 신고 연병장을 나서는 순간, 눈앞에 등장한 파랑색 더블캡은 거대한 아버지 같았다. 홍천강 제방에 세워놓고 차 안에서 오랜만의 엄마 음식을 먹었던 곳도 더블캡이다. 시동소리만 들어도 아버지가 돌아오셨다는 것을 알만큼 더블캡은 아버지의 일부였다.


3년 전에 두 분 부모님은 동시에 큰 병을 얻으셨다. 입사 15년 만에 휴직을 내야 할 상황이었다. 바쁜 상황이었음에도 고마운 동료들은 내게 두 달의 시간을 허락했다. 그중 한 달 동안 아들 노릇 열심히 하고 나니 다른 한 달이 남았다. 공허함과 허탈함을 달래려 동네 문화센터를 찾았고 그렇게 만난 것이 내 우쿨렐레이다.

쉬이 싫증 내던 나와 어울리지 않게 1년이나 배웠다. 복직 후에도 매주 수요일이면 들뜬 마음으로 강습에 나갔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합주하는 넉살도 부리게 하고, 집에 돌아와서 운지와 스트록을 꼬박꼬박 연습하게도 만든 신기한 물건이다. 또한, 그렇게 연주하고 노래하는 동안은 나 홀로 뮤지션이고 노래방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찾아와 같이 흥얼거려 주기도 했다.  



리베카 솔닛은 그의 수필 <멀고도 가까운> 첫 글에서 엄마와 살구 이야기를 한다.


"동화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 문제에 휘말렸다가 그것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중략)

대부분의 이야기에 담긴 핵심은 역경에서 살아남는 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 어려움은 늘 필수 사항이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배우는 건 선택사항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려 예전과 다르게 변해버린 엄마를 보고, 작가는 동화에 자주 나오는 저주와 같다고 표현한다. 그 어떤 노력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엄마는 저주였고, 반면 그녀 앞에 놓인 100파운드의 살구 더미가 그것을 푸는 열쇠처럼 보였다. 정상적인 엄마 시절에 집 마당에 있던 살구나무에 대한 기억들이 그녀에게 살아 숨 쉬었다. 열매가 열리고, 다양한 모양과 색깔과 냄새를 띄고, 열매를 따고, 병과 깡통에 담고 버리고, 술을 담그는 여러 기억은 저주받은 상황에서 엄마의 기억을 열어내는 열쇠이자 고리라고 말한다.

작가에게 살구는 엄마의 물건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은 우쿨렐레였으면 좋겠다. 특히, 내 아이들이 그랬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수많은 나의 말과 행동이 그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의도를 가진 말도 있고 오해로 전해질 말도 있다. 모든 이 나의 일부일 테니, 이쁜 것만 거르고 전해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또한, 말하고 싶어도 전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것들도 있다. 몸소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것들, 다 지나고 떠나고 난 다음에야 찾아내는 그런 것들 말이다.


우쿨렐레를 치는 순간만큼은 그 어떤 집착도 사라진다. 악보를 보며 코드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고 스트록과 아르페지오로 연주한다. 기운 나면 노래도 흥얼거려본다. 그 순간만큼은 사는 일이 그냥 흥겹고 풍요로워진다.


세상살이 '진지'하게 대해라고 한다.

여기에다 진지를 내려놓고 오롯이 느껴보는 풍요도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나의 물건이 우쿨렐레가 되었으면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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