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징그러운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나 너네 조카 하면 안돼? 너네가 내 삼촌숙모면 좋겠다"라는 친구의 말.
"조카가 나랑 동갑이면 너무 징그러운데"라고 에둘러 말하며 웃었다.
삼촌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친구는 자주 조카를 만나러 가는
우리 부부의 다정함이 부럽다며 우리 조카가 되고 싶어 했다.
친구처럼 속 깊고 따뜻한 조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친구가 조카가 된다니 징그러웠다.
나에게는 두 명의 조카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여자 아이와 초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
여자 아이는 어딜 가든 꼭 내 선물을 챙겨 오는 정답고 사랑스러운 아이다. 이번에도 놀이공원에 가서
본인이 쓸 펜과 내가 쓰면 좋겠다 싶은 펜을 골라왔다. 내 선물만 챙겼다니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아이가 전해오는 티 없는 마음은 뭉클함을 안겨준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남자 조카와 달리
낯을 가려서 눈으로만 힐끗힐끗 나를 볼 뿐 곁에 오지 않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어느새 마음을 활짝 열고
"숙모"하고 한달음에 달려와 안길 때면 몸과 마음에 따뜻한 숨이 불어오는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주말이면 조카를 만나러 자주 가는데, 이번에는 농부학교에 참석하기 위해서 걸음을 옮겼다.
여자 아이는 아파트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합기도 공연을 선보이기로 했고, 남자아이는 농부학교에 가야 하는데 시언니가 아이 두 명을 돌볼 수 없어서 우리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남자아이는 활동적이고 힘이 넘친다. 농부학교까지 가려면 2시간가량을 차를 타고 가는데 지친 기색도 없다. 가는 길에 접촉 사고를 낸 차량 때문에 길이 막혀 도착 시간이 늦어지자, 혹여나 늦을세라 발을 동동 구른다.
결국 늦고 말았고,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통통 공이 튀듯이 밖으로 달려 나간다.
간단하게 간식을 챙겨 먹고 벼 베기를 하는데, 낫을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가 다칠지도 모르니 주의를 해야 한다며 몇 번이고 조심하라며 농부학교 원장선생님의 주의를 주었다.
나는 낫을 들고 벼를 한 움큼 잡아서 베려고 했으나 생각처럼 벼는 잘 잘리지 않았다. 너무 양이 많은가 싶어서 슬그머니 벼를 나눠 쥐고서 다시 낫질을 해보았다. 역시 생각처럼 쓱 잘리지 않았지만, 나는 힘이 센 편이고 쓱싹쓱싹 톱질하듯이 잡아당겼더니 벼가 베어졌다. 몇 가닥 채 되지 않은 벼를 안고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함께 간 시어머니는 제법 농부 태가 난다고 기뻐하셨지만, 나는 속으로 '농사일은 힘만 가지고선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오기가 생긴 나는 다시 벼를 잡고서 낫질을 해보았다. 처음보다 수월하게 벼는 잘랐고, 몇 번의 낫질 끝에 내 뒤로 벼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걸 보니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들어 팔과 허리가 아파왔지만 열심히 쓱싹쓱싹 벼를 베었다. 베어온 벼는 한 곳에 모아 탈곡을 했는데, 낱알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모습을 보니 신기함과 동시에 팝콘이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중 낱알을 하나 집어 손으로 가보니 쌀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 조카는 쌀 한알씩을 맛보며 농사의 보람을 느꼈다.
사실 농부학교에서 체험만 하는 거라 힘이 들기는커녕 흥미롭다. 우리가 벼를 베고 탈곡을 하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어떤 과정을 거쳐 쌀이 되는지 맛만 본 것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쌀 한 포대를 받아 들고선 농사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하루도 나에게 보다 타인에게 다정한 날이지만, 조카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 덕분에 풍성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