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름을 싫어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그 기분이 싫었다. 흐르는 땀이 접착제가 되어 메리야스며 속옷을 몸에 딱 달라붙게 만드는 그 찝찝함도 싫었다.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저서에서 여름을 ‘형벌 중의 형벌’이라 표현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감옥 안의 좁은 잠자리에서는 옆 사람을 단지 37°C의 열 덩어리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움의 원인이 고의적인 행동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슬픈 상황.
우리네 일상은 감옥과 같은 열악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연인들도 겨울에는 깍지를 끼어가며 꼭 잡은 손을 여름에는 새끼손가락 정도 걸고 다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여름이 겨울에 비해 사람 사이에 물리적 거리를 만드는 것은 맞는 일인 듯하다.
학창 시절 한 여름에 어머니를 도와 논에서 일을 하다가 쨍쨍 내리쬐는 햇볕을 참지 못하고 불평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와, 더워서 더 이상 못하겠다. 여름은 도대체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더위에 지친 아들을 보면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여름은 여름답게 더워야 하고,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한단다. 여름에 강렬한 햇빛을 받아야 곡식들이 튼실하게 여물 수 있는 거야. 여름내 강렬한 햇빛을 못 받은 벼들을 수확하면 껍질만 있고 알맹이가 들어있지 않은 쭉정이들이 된단다.”
그때 알았다. 쨍쨍 내리쬐는 땡볕의 가치를. ‘무더운 여름을 견뎌낸 곡식들만이 꽉 찬 알맹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구나. 마치, 단군신화 속 곰이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로 100일을 버텨 사람이 된 것처럼. 여름의 시간은 인고의 시간이구나.’
문득 얼마 전 신문에 실린 BTS 기사가 떠올랐다.
BTS ’버터‘, 빌보드 4주 연속 1위, 다이너마이트 기록 깼다’
빌보드에서 4주 이상 1위를 기록한 곡은 역사적으로 13곡 밖에 없고, 그룹으로서는 세계적으로 두 번째라는 기록을 세웠다는 것이다. BTS는 이미 한국을 넘어선 세계적인 스타다. 그렇다면 BTS는 처음부터 스타였을까? BTS는 ‘흙수저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들의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BTS는 2013년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라는 중소 기획사에서 데뷔를 했다. 당시 발표했던 노래는 방송가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소속 기획사는 그들을 물량 공세로 마케팅할 여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을 흔들리지 않았다. 끊임없는 연습과 도전을 통해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쌓아갔다. 자신들만의 ‘여름의 시간’을 버틴 끝에 전 세계가 인정하는 아티스트가 된 것이다. 그들의 ‘버터’라는 노래 제목을 보며 한편으로 (자신만의 여름의 시간을) ‘버텨’라고 읽히는 이유다.
어떤 의미에서 가을이 ‘빛’이라면 여름은 ‘그림자’라 할 수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이 있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은 풍성한 시기다. 하지만 가을의 그 풍성함과 넉넉함은 여름이라는 그 인고의 과정이 만들어 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여름은 그렇게 가을을 빛내기 위해 묵묵히 그림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삶을 돌아본다. 인고의 여름을 건너뛰고 가을의 풍성함만을 탐했던 것은 아닌지.
나는 작가라는 꿈을 갖고 있다. 글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하루하루 글을 쓴다. 일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나를 흔드는 모든 것들이 나의 글감이다.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을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기도 한다. 생각을 끄집어내 문장을 완성하고 그 안에 의미를 담아내는 과정의 고됨을 표현하는 것이리라. 누가 쓰라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 글을 쓰다 너무 힘이 들어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한 글자 한 글자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한 편의 글을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나는 고되고 고된 그 ‘여름의 시간’을 좋아한다. 그 인고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어제와 다른 나를 만들고 오늘과 다른 내일의 나를 만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여름을 '버티면' 가을엔 '버터'를 얻을 수 있다. BTS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