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동안 쌍둥이 아들들과 노느라 다크서클이 짙어진 나에게 K선배가 말했다. K선배는 계산이 확실하고 계획적인사람이었다. 군더더기(?) 있는 행동을 잘하지 않았고, 일상생활에서 손해 보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업무를 하면서도 성과가 될 사항에는 집중했고, 성과와 관련 없는 사항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경력관리도 철저해서 동기들 중에서 진급도 빠른 편이었다.
K선배의 논리는 이랬다. 외동아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아이가 다섯 살부터 매년 외국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여덟 살까지의 외국여행은 기억하지 못하고 아홉 살부터의 여행만 기억하더란다. 그래서 '아홉 살'이라는 기준을 잡았던 것이다. K선배는 아들과 왜 계속 놀아주냐며 큰 경험과 추억만 쌓아주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한 기념으로 K선배는 부자지간의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아들이 특목고를 입학한 기념 선물이기도 했다. K선배의 입시전략과 교육에 힘입어 K선배의 아들은 특목고에 입학했던 것이다. K선배는 성공적인(?) 자녀교육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아빠가 처음이었던 나는, K선배보다 아빠의 경험이 적었던 나는, K선배 보다 계산 능력과 계획 능력이 부족했던 나는 K선배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면 아기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태교는 왜 하나’ 반문하고 싶었지만 태교의 효과를 객관적 데이터로 증명할 수 없었기에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K선배의 그 말 이후, 틀린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일리가 있었던 '아홉 살 육아론'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몇 살부터 아이에게 잘해줘야 할까?'
'아이의 기억을 기준으로 전략적(?)으로 육아하는 것이 효율적인 육아인가?’
며칠 전 큰 아들 건이가 ‘툭’ 던진 한마디에서 K선배가 제시한 '아홉 살 육아론' 화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아빠, 왜 요즘은 뽀뽀 안 해줘요?”
아들과 놀고 있는데 아들이 지나가 듯 한 마디를 던졌다. 그동안 나는 쌍둥이 아들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해오고 있었다. 아이를 부를 때는 “사랑하는 우리 아들, 밥 먹었어?”, “사랑하는 우리 아들, 뭐해?”라고 수식어를 붙였다. 놀고 있는 아들에게 다가가 갑자기 이마에, 눈에, 코에, 볼에 뽀뽀를 하기도 했다. 가끔은 코와 코를 비비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언젠가 아들이 이런 퀴즈를 낸 적이 있다.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들’이 뭘까요?”
‘내가 좋아하는 들이 있다고?’
“아들이에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하잖아요.”
아이들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평소 아빠와 엄마의 말과 행동을. 보지 않는 듯 보고 있었고 듣지 않는 듯 듣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뽀뽀를 하던 당시에는 무심한 듯 귀찮은 듯 반응했지만 다 보고 다 듣고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데 내 질문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몇 살부터 기억하는지 그 시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기억을 남겨줄지가 더 중요하다. 언제부터, 무엇을 기억할지는 아이들이 정한다. 사랑받는 느낌, 사랑받지 않는 느낌. 아이들은 강렬한 기억과 추억들은 알아서 기억한다. 아무리 어릴 적 경험이라도.
사랑은 계산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어느 구름에 비가 올지 모른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듯그냥 꾸준히 사랑을 주다 보면 아이들은 어느새 사랑이 충만한 사람으로 자라 있는 것이다.
K선배는 나의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자녀교육은 셀프다.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아이를 더 잘 키웠는지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본적인 기반을 만들어 주면 그뿐. 육아의 정답이 아닌 자신들만의 방식을 찾으면 될 뿐. 아이는 부모가 키우지만 부모를 키우는 건 어쩌면 아이들 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