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유리상자 ‘사랑해도 될까요?’ 노래의 첫 소절이다.대중가요는 다 자기 이야기 같다고 말하지만 이 노래 가사는 정말 내 첫 짝사랑의 추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내 첫 짝사랑의 잊을 수 없는 그 장면은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오기 10여 년 전인 1987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그때 내 나이는 여덟 살이었다.
아침 일찍 등교를 해서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교실 앞 칠판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왜 하필 그때 뒷문을 그렇게 바라보고 싶던지. 고개를 돌려 뒷문을 보는데 문이 열렸고여자 아이들 몇 명이 등교를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아이한 명이 눈에 띄었다. 아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음이 된 채로 그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 기억 속 그 아이가 교실 뒷 문을 들어오는 그 장면은 '슬로 모션'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그 기분. ‘바로 이 사람이구나’ 하는 이유 모를 확신. 'A'는 우리 학교로 전학을 온 것이었다. 그날은 '1일'이었다. 그 친구가 학교에 온 1일, 그리고 내 마음속에 들어온 1일. 그날부터 나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A'였다. 교실 전체를 둘러보는 듯하면서 'A'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내 눈동자가 A를 스쳐가는 시간은 '1초' 정도였지만 그 순간 내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내성적이고 애 어른 같던 나는 'A'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장난을 잘 치는 친구들은 'A'를 놀리기도 하고 장난도 걸면서 잘 놀았다.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나는 항상 그 모습을 부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나의 첫 짝사랑은 초등학교 6년 내내 계속되었다.
초등학교 졸업을 몇 개월 앞둔 어느 날 갑자기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던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같은 중학교를 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졸업하는 순간 멀어질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어 고백을 하기로 결심했다. 두 세장 분량의 편지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마음을 담았다. 삼심 년도 지난 이야기지만 첫 러브레터의 몇 구절이 생각난다. ‘지금 이 감정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고...’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글거리는 열세 살 소년의 절절한 고백의 문장들. 편지를 다 써놓고도 우체통 앞에서 수 백번을 고민했다. 편지를 보내고 'A'의 얼굴을 어떻게 볼지 하는 고민. 답장이 안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하지만 고백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고백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몇 개월을 기다렸지만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 그렇게 수줍은 첫 고백은 실패로 돌아갔다.
여덟 살 아들이 학교에서 어떤 여자 친구가 줬다며 포스트잇 쪽지를 한 장 내밀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딱 봐도 러브레터였다. 포스트잇에 고심 고심해서 마음을 적어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사랑은 마음이다. 사랑은 행복이다. 1학년 사랑반 이 XX’
시작은 아주 작은 포스트잇이었던 듯하다. 마음을 적어가다 볼펜으로 긋고 공간이 모자라 조금 더 큰 포스트잇에 붙여 완성한 작지만 마음이 담긴 훌륭한 러브레터였다. 그 포스트잇을 보는데 6학년 때 첫사랑 A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편지를 쓰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아들보다 그 쪽지를 전해준 그 여학생의 마음에 더 신경이 쓰였다. 아직은 이성에 대한 관심이 적어 그 애절한 포스트잇을 그냥 작은 종이 한 장으로 취급하는 아들이 조금은 야속한 생각까지 들었다.
아들아, 너도 언젠가는 사랑에 빠지는 날이 올 거야. 그 사람만 보면 애가 타고 가슴이 절절해지는 그런 사랑. 보통 ‘첫사랑’은 잘 안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 아빠가 어렸을 때는 그 말을 인정 안 했었거든. 근데 살아보니 알겠더라.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가수 서영은의 ‘내 안의 그대’란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
‘어떡하죠. 첫사랑은 힘들다는데 나 지금 누구라도 사랑하고 올까요?’
열세 살 그 시절 아빠의 첫 짝사랑의고백은 서툴렀었다. 살아보니 사랑은 쌍방향이더라. 내 감정만큼이나 상대방의 감정도 중요하더라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사람과 좋은 인연을 만들고 싶다면 상대방이 '뜬금없고 일방적인 고백'에 놀라지 않도록 평소에 그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조금씩 마음을 전해주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 어쩌면 이 이야기는 포스트잇 편지를 줬던 그 여학생에게 해줘야할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어 네가 고백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단다.
아빠의 첫 고백은 뜬금없었고, 고백 후의 그다음은 무책임했던 것 같다. 고백 후로 그 사람은 나를 신경 쓰기 시작했을 텐데 아빠는 그 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든. 나이가 들어서 조금씩 알겠더라. 첫사랑이 성공하기 힘들다고 했던 이유를.
아직 찾아오지 않았지만 아빠는 너의 '첫사랑'을 뜨겁게 응원한다. 그게 짝사랑이든 함께 하는 사랑이든. 힘껏 애태우고, 사랑하고, 소통하기를 바란다. 하나만 기억해줬으면 해.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다'라는 사실.
아 참, 그리고 아빠는 엄마가 '첫사랑'이야. 지금까지 이야기는 아빠가 들었던 이야기야. 엄마한테는 비밀! 무슨 말인지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