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 잘 주는 예쁜 고모

by 오늘도 생각남

“촌놈들은 이거 못 먹어봤지?”


막내 고모는 ‘바나나’를 내미셨다. 그 시절(90년대 초) 바나나는 비싼 과일이었다. 내게 바나나는 TV 속 미국 드라마나 만화에서나 나오던 진기한 과일이었다.


어렸을 적엔 친척 어른들을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용돈을 주시는 어른과 용돈을 주시지 않는 어른. 용돈을 주는 친척 어른이 집에 오시는 날이면 그렇게 마음이 들뜰 수가 없었다.


서울 막내 고모는 용돈을 제일 잘 주는 어른이었다. 오실 때마다 만원 짜리 지폐를 척척 내주셨다. 90년대 초반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내게 그 돈은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지금은 천원이 넘는 아이스크림이 당시에는 백 원이던 시절이었다. 막내 고모가 주신 돈은 백 개의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있는 큰돈이었다.


막내 고모는 용돈만 잘 주시는 것이 아니었다. 바나나처럼 시골에서 먹어보기 힘든 음식들도 갖다 주셨다. 집에 오실 때마다 할머니 새 옷도 잊지 않고 챙겨 오셨다.


“엄머, 이 옷 입어봐. 나이 들수록 밝은 색 옷 입어야 해. 우리 엄마 진짜 이쁘다.”


어린 내게 고모는 호탕하고 쾌활한 ‘서울 부자’처럼 보였다. 막내 고모는 과부셨다. 사십 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서울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며 혼자서 두 아들을 키우고 계시던 상황이었다.


1년에 한두 번 보던 막내 고모와 스무 살 무렵 동거를 하게 됐다. 평소 모의고사보다 수능 시험을 못 봤던 나는 부모님의 권유로 재수를 하게 됐다. 이왕이면 서울 재수학원이 좋겠다는 판단에 따라 막내 고모 집에서 학원을 다니게 됐다.


때는 1999년. IMF 한파로 다들 먹고살기 힘든 엄혹한 시절이었다. 분식집을 하며 돈을 조금 모은 막내 고모는 삼겹살 가게를 개업하셨다. 개업 발로 장사가 반짝 잘 되었지만 매출은 이내 곤두박질을 쳤다. 월세며 관리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막내 고모는 가게를 파시고 다시 조그마한 분식집을 시작하셨다.


막내 고모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분주하셨다. 그 와중에 재수학원에 다니는 조카(나)를 위해 매일 새벽같이 도시락을 두 개씩 싸주셨다. 일주일 중 일요일 하루가 막내 고모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막내 고모는 쉬는 날이면 늦게까지 누워계셨다. 방에서는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호탕하게 척척 주시던 그 만 원짜리 지폐를 막내 고모가 어떻게 버셨는지.


세월이 흘러 나는 9살 쌍둥이를 키우는 가장이 되었다.


“쌍둥이 잘 크지?”


안부 전화를 드리면 막내 고모는 쌍둥이들 안부를 물으셨다. 그리고 쌍둥이들에게 주라며 용돈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어머니께 들은 말인데 고모는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시다고 했다. 막내 고모 집에서 재수 학원을 다니던 그 시절 막내 고모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드셨다고 한다. 동생(우리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조카(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때 잘 챙겨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는 말씀이셨다. 막내 고모가 쌍둥이에게 용돈을 주실 때면 마치 스무 살 나에게 주시는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고 곱절로 감사한 생각도 들었다.


막내 고모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간병인으로 일을 하고 계셨다. 두 아들이 이미 가정도 이루고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 경제적으로 불편함이 없으셨지만 일을 쉬지 않으셨다.


며칠 전 사촌 형에게 청천벽력 같은 연락이 왔다. 막내 고모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서 응급실에 입원하셨다는 내용이었다. 몇 시간 째 의식불명 상태라고. 그리고 이틀 뒤 다시 연락이 왔다. 숨을 거두셨다고. 이미 응급실 입원 당시부터 뇌사 상태여서 가망이 없으셨다고.


지병을 갖고 계시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고 했다. 사촌 형은 막내 고모가 최근에 조금 무리해서 일을 하셨다고 말했다.


40대에 남편을 일찍 보내고, 분식집을 하며 두 아들을 억척같이 키워내신 당신.


고생하며 번 피 같은 돈으로 고향 집에 올 때마다 할머니 선물이며 조카들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던 당신.


촌놈 조카들 기죽지 말라며 만원 짜리 지폐를 척척 꺼내 주시던 당신.


경제적으로 제일 어려웠던 시절 동생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조카를 데리고 있으면서 그때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버릇처럼 말씀하셨다던 당신.


“고모님, 고모님으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은 항상 행복했어요.


고모님이 집에 오실 때마다 촌놈 조카들은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요. 이승에서 고생 많이 하셨으니 그곳에서는 더 이상 고생하지 마시고 편이 쉬세요. 촌놈 조카는 고모님이 사다주신 생애 첫 바나나 평생 잊지 못할거에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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