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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꼰대 오리와 미생 청년 오리

by 오늘도 생각남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기 오리’는 ‘백조’가 되지 못했다. 그냥 ‘청년 오리’로 자랐을 뿐. 그것도 ‘미생 청년 오리’로. ‘흙수저와 금수저론’, ‘N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등 포기한 세대), ‘청년실신’(청년 실업자 및 신용 분량자),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같은 신조어들이 ‘청년 오리’의 미생으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기 오리는 동화에서처럼 시간이 흐른 뒤 아름다운 백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동화는 동화일 뿐이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동화 속 ‘미운 아기 오리’는 ‘백조 혈통’을 타고 난 금수저였다. 자신의 신분을 늦게 알아차렸을 뿐.

청년 오리의 미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었다. 작은 손전등을 들고서 한 발 한 발 내딛을 수 있을 정도의 앞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대다수의 청년 오리가 같은 처지라는 슬픈 현실이었다. 혼자라면 더 쓸쓸했을 현실을 대다수의 ‘미생 청년 오리’가 같이 겪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꼰대 오리'의 불안한 삶도 청년 오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삼팔선'(38세까지 직장에서 버티면 선방), '사오정'(45세가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 같은 신조어들이 '미생 꼰대 오리'의 고단한 삶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아기 오리들은 자라나고 직장은 불안하고 미생 꼰대 오리는 꿈속에서도 안정된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었다. 꼰대 오리에게도 아기 오리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막연히 어른이 됐을 때 하늘을 훨훨 나는 ‘백조의 삶’을 꿈꿨다. 하지만 나이 들어 알게 되었다. 모든 오리가 백조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었다. 모든 오리가 백조가 될 필요도 없다는 사실.


꼰대 오리는 꼰대답게 청년 오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미생 청년 오리’의 시절을 지나오면서 깨달은 것들은 청년 오리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 시절 자기가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은 어떻게든 알려주고 싶었다. 꼰대 오리는 편지를 써보기로 했다.


“청년 오리! 반갑네. 나는 청년 오리 시절을 지나 이제는 꼰대가 돼버린 꼰대 오리일세. 내가 하는 말들이 자네에게는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을 것이네. 하지만 팍팍한 자네들의 일상을 보니 나의 청년 오리 시절이 떠올라 이렇게 용기를 내서 몇 자 적어보네.


나는 텔레비전을 좋아하는데 말이야. 거기서 봤던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네. 국민 예능이었던 ‘무한도전’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여름이면 무한도전은 '고속도로 가요제'를 열어 무더위를 씻어주곤 했지. 무한도전 가요제의 수많은 명곡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말하는 대로’라는 노래네. 유재석과 이적이 함께 부른 노래지. 뻔한 가사일 수 있지만 그 노래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국민 MC 유재석의 무명시절의 고뇌가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일세. 아무도 자기를 찾지 않던 무명시절 유재석의 고민은 ‘내일 뭐하지, 내일은 뭐하면서 하루를 때우지?’하는 것이었다고 하더군. 그러다 문득 ‘내일 뭐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비슷한 말로 들릴 수 있지만 ‘뭐하지’와 ‘뭘 할지’는 천지차이네. ‘뭐하지’가 현실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라면 ‘뭘 할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 전진하려는 의지가 담겨있지.


최근에 알게 된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도 자네에게 꼭 들려주고 싶네. '동요'인데 말이야 이 노래를 들으니 내 마음이 '동요'되더군.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주먹이 불끈 쥐어지더군. 제목은 ‘모두 다 꽃이야’일세.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봄에 피어도 꽃이고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더군. ‘아름다운 백조’이든 ‘미운 오리’이든 조류일 건 똑같다는 생각. 꽃이 피는 시기는 꽃마다 각기 다르지. 봄에 피는 꽃도 있고 가을에 피는 꽃도 있고. '가을에 피는 국화는 봄에 피는 진달래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라고 하더군. 자신들의 '때'를 알고 있기 때문일 거야. 꽃처럼 우리들도 각자의 속도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네. 주위를 둘러보면 나보다 훨씬 화려하고 속도도 빠른 것들이 많이 있을 걸세. 삶이 당장은 '상대평가'처럼 보여도 길게 놓고 보면 '절대평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걸세. 남보다 더 빨리 더 멀리 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삶 자체인 것이지.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소중한 내 시간과 삶을 흘려보내지 않기를 바라네.


꼰대면 꼰대지 왜 이런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하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 수도 있겠군. 나도 자네와 같은 ‘미생 청년 오리’의 시절을 지나왔다네. 어린 시절엔 막연하게 ‘백조의 꿈’도 꾸었지. 수많은 실망과 시행착오를 거쳐 '오리는 오리의 삶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네. 내가 자네에게 이런 조언을 하는 이유는 내가 지금 '완생'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네. 나도 자네처럼 아직도 '미생'의 삶을 살고 있네. 하지만 먼저 그 길을 걸어온 미생 선배로서 그 길을 너무 힘겹게 걷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내 경험을 들려주고 있는 것일세. 우리 아이들도 조만간 자네들처럼 ‘미생 청년 오리’가 될 예정이야. 자네도 우리 아이들도 그 시간을 너무 힘겹게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네. ‘미생’이라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네.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간다는 거니까.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꼰대가 된 우리 세대들도 대부분 미생의 삶을 살고 있다네. 어차피 인생은 과정을 사는 것이고 우리 삶의 과정은 대부분 미생이지. 그러니 자네의 현재 모습에 너무 실망하거나 의욕을 상실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세상에 정답은 없는 듯하네. 백조의 삶만이 정답이 아니듯 오리의 삶도 오답은 아니라네.


지금 자네의 모습 그대로에 응원을 보내네. 너무 힘이 들 땐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힘 빼고 그냥 물 흐르듯 지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듯하네. 그럼 미생 꼰대 오리의 잔소리는 이만 줄이겠네.’


미생 꼰대 오리는 그렇게 편지지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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