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름방학을 끝내고 오랜만에 학교에 다녀온 건이(8살).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모른 척하고 '오랜만에 학교에 가니 재미있었냐'고 물었다. 울먹울먹 하며 아이가 품에 안겼다. 국민건강체조 잘 못해서 선생님께 혼났다며.
아차 싶었다. 사실 건이는 개학 하루 전날인 어젯밤 아빠에게 당부를 했다. 체육시간에 '국민건강체조'를 하는데 잘 기억이 안 나니 개학날 아침 등교 전에 영상을 보여달라고. 체육선생님이 무섭다고. 개학날 아침 서둘러 아침을 챙겨 학교에 보내다 보니 어제밤 건이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건이는 개학날 아침 현관문을 나가면서도 다시 국민건강체조 이야기를 했다. 영상 보여달라고 했는데 왜 안 보여줬냐며.
체육시간, 선생님께서 건이에게 물었다고 한다. 국민건강체조 많이 연습했냐고. 건이가 조금밖에 연습 못했다고 하니 선생님께서 화를 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조금 연습한 게 자랑이냐
가슴이 아팠다. 아이의 부족함을 모질게 질타하는 선생님께 서운했고, 몇 번의 아이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흘려보낸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다른 아이들은 국민건강체조를 다 익혀서 틀리지 않았는데 우리 쌍둥이들만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해서 혼이 났다고 한다.
다음 체육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아이들에게 국민건강체조를 어떻게 알려줄까 고민을 했다. 시범 영상을 반복해서 보여주면 되겠지만 속상한 마음에 하루라도 더 빨리 체조를 익혀주고 싶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구분 동작을 정리해서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도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고생한 경험이 많았다. 그중 하나는 군대 훈련소 시절이었다. 19개 동작으로 이뤄진 총검술이 있었다. 가상의 적군이 앞에 있다고 가정하여 총끝에 검을 끼워 싸우는 동작이었다. '좌 베어', '우 베어', '막고 차고 돌려 쳐'. 총검으로 베고 발로 차고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지금 생각해도 복잡한 동작이었다. 다른 동기들은 잘도 외우더구먼 나는 잘 외워지지 않았다. 동작 순서별 이름과 각 동작별 주요 이미지를 종이에 적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군대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조교들이 성실하게 훈련을 잘 따르던 나를 훈련소 조교로 뽑으려고 했으나, 총검술, 제식훈련(단체 줄 맞춰 걷기 훈련) 등에서 자꾸 틀리는 모습을 보고 포기했다고 한다.
국민건강체조를 정리해봤다. 1999년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만든 체조였고, 총 18가지 동작으로 이뤄져 있었다. 동작이 이렇게 많으니 애들이 외우기 힘들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를 닮았으면 기억력이 좋지 않을 아이들을 생각해서 자세한 설명서가 필요할 것 같았다. 마인드맵을 활용해서 개별 동작 이름과 동작별 이미지를 넣어서 체조 연습 참고자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출력한 종이를 주며 말했다.
건아, 준아 아빠가 보니까 국민 건강체조 동작이 18개나 돼. 외우느라고 힘들었겠다.
* 이미지 출처 : 국민체육진흥공단
그리고 아빠의 훈련소 시절 이야기도 들려줬다. 아빠도 훈련소에서 19개 동작이나 되는 총검술을 배웠는데 동작이 너무 많아서 외우기 힘들었다고. 동작을 못 외워서 조교들한테 혼나기도 했는데 연습하다 보니까 다 외워졌다고. 건이가 말했다.
아빠도 외우느라 힘들었겠다
그 말은 체조 동작을 외우지 못해 선생님께 혼난 자신을 위로하는 말처럼 들렸다.
'아들, 아빠가 살아보니까 세상은 내가 잘못한 것보다 훨씬 더 나를 혼낼 때가 있더라. 아무런 잘못을 안 했는데도 억울하게 혼내는 경우도 있고. 그 당시에는 아빠도 많이 힘들었는데 누가 그런 말을 해주더라. 아빠 잘못이 아니라고. 잘못된 건 그 사람들이고 잘못된 시스템이라고. 잘못된 사람이나 시스템 때문에 너무 힘들어 안 했으면 좋겠다. 문득,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라는 시가 생각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