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위에 그어진 무례함
최근 한 유명 배우가 공공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에 버젓이 볼펜으로 밑줄을 긋고 소셜 미디어에 ‘완독 인증’을 올려 큰 질타를 받았다.
"기억하고 싶은 부분에 선을 긋던 습관이 무의식 중에 나왔고, 너무도 부주의했다"는 사과와 변상 약속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이 씁쓸한 해프닝은 우리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 하나를 던진다.
왜 우리는 유독 '책'이라는 매체 앞에서, 그것도 모두가 함께 읽는 공공의 책 앞에서 그토록 쉽게 무례해지는 걸까? 이번 일을 계기로 책이라는 존재에 대해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도서관과 서점, 침묵 속에 멍드는 책들
이번 사건은 결코 한 사람만의 유별난 일탈이 아니다. 당장 가까운 공공도서관이나 대형 서점에 가보아도 책들이 견뎌내고 있는 수난 시대는 처참할 정도이니까.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들은 누군가의 무자비한 형광펜 자국과 낙서로 얼룩져 있고, 추리소설의 결정적 단서나 실용서의 핵심 페이지는 아예 날카롭게 찢겨나가 텅 비어 있기 일쑤이다. 커피나 음식물을 흘려 쭈글쭈글하게 우는 페이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어 읽으며 지혜를 교류해야 할 공공재가, 누군가의 이기심과 무신경함으로 인해 개인의 낡은 연습장처럼 전락해 버린 것이다. 오죽했으면 훼손도서 전시회까지 열릴 정도니 말이다.
새 책이 주인을 기다리는 서점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와 친분이 있는 서점 주인이 얘기해 준 무개념 사람들의 행위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아직 팔리지도 않은 책의 허리를 쩍쩍 갈라지도록 꺾어 넘기며 읽는 사람, 손가락에 침을 묻혀 페이지를 넘겨보고 사지 않는 사람, 심지어 진열된 책들을 탑처럼 쌓아놓고 방치하거나 훼손하는 사람.
서점에서 책이라는 존재가 제값을 치르고 소중히 소유해야 할 귀중한 예술품이 아니라, 잠시 시간을 때우고 언제든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 일회용 소모품처럼 취급받는 모습에 씁쓸함이 남는다.
다른 예술에는 엄격하면서, 책에는 왜 관대할까
만약 누군가 미술관에 걸린 캔버스에 "내가 감동받은 색감"이라며 펜으로 동그라미를 친다면 어떨까? 혹은 오케스트라 연주회 한가운데서 연주가 마음에 든다며 불쑥 무대 위로 올라가 악기를 만진다면? 아마 당장 쫓겨나 사회적 지탄과 엄청난 배상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 편의 영화, 한 곡의 음악, 한 점의 그림 앞에서는 숨을 죽이고 창작자의 노고에 숭고한 경의를 표할 줄 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탄생하기까지 작가가 쏟아부은 수많은 밤과 치열한 고뇌의 시간, 활자 하나하나에 꾹꾹 눌러 담은 영혼의 무게는 너무도 쉽게 평가절하되곤 한다.
단순히 종이라는 흔한 물성을 가졌기 때문일까? "종이 뭉치일 뿐"이라는 무의식적인 폄훼가, 책을 함부로 대하고 훼손해도 된다는 얄팍한 면죄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프게 돌아보게 된다.
"책을 훼손하는 것은 단순히 종이를 찢고 잉크를 칠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지어 올린 세계와 다음 독자가 누려야 할 감동의 기회를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한 권의 책은 단순히 글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활자로 지어진 공유된 성전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치열한 삶이 담긴 고백록이자,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창이며, 물리적 시간을 뛰어넘어 타인과 깊이 교감할 수 있는 훌륭한 예술 콘텐츠이다. 특히 도서관의 책은 수많은 사람의 체온과 시선, 그리고 사유가 조용히 머물다 가는 '공유된 성전'과도 같다.
내가 그은 무심한 밑줄 한 줄이 다음 독자의 시선을 강제로 옭아매고, 무신경하게 접어버린 페이지 하나가 누군가 온전히 몰입해야 할 문장의 여운을 단절시킨다. 타인의 감상 방식을 내가 강제하고 방해하는 일, 그것은 예술을 향유하는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약속을 깨뜨리는 명백한 이기주의이다.
활자의 무게를 존중하는 다정한 독자가 되기를
책을 대하는 태도는 곧 타인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비추는 거울이다. 책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정갈한 손길에는 창작자에 대한 예우와, 이 책을 읽게 될 미지의 타인을 향한 다정한 배려가 스며 있다.
이번 사건을 그저 한 개인의 무지몽매함으로 치부하고 손가락질하며 끝낼 일이 아니다. 우리 안에도 은연중에 똬리를 틀고 있는 '책을 향한 오만한 태도'를 되짚어보는 자성의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지금 당신의 곁에 놓인 책, 혹은 내일 도서관에서 집어 들게 될 누군가의 손때 묻은 책을 다시 한번 지그시 바라보자. 그 안에는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빚어진 놀라운 세계가 조용히 박동하고 있다. 그 경이로운 세계를 훼손 없이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이제 우리는 책이라는 이름의 예술에 조금 더 다정하고 예의 바른 독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일이 책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깊은 공감과 사유가 되어 책이라는 콘텐츠를 더 소중하게 다루고 책에도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계기가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