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15화
“뭐라고? 삼랑진에? 거긴 무슨 동네야? 어떻게 생긴 건물인데? 사진 좀 보내줘 봐.”
창화는 경식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경식은 건물주가 됐다는 창화의 말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다. 왜냐하면, 경식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퇴직금과 보상금을 받았다 해도 건물까지 산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 인마. 미쳤냐? 이걸 건물이라고 샀어? 네 회사 생활, 네 인생 보상받은 거로 고작 이런 동네에 이 낡은 건물에 투자했다고?”
“경식아,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다. 내가 이 사진관의 주인이라는 거,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옥탑방에서 살 수 있다는 거… 너어무 좋다.”
“하… 미치겠다. 내가… 너 인마, 그 부동산한테 코 꿰인 거야. 누가 이런 걸 사겠냐? 그러니까 너 같이 그 동네 사정 잘 모르는 외지인이 사겠다고 하니까 옳다구나! 하고 판 거라고!”
“야, 됐고. 내가 여기서 뭐라도 하게 되면 넌 그때 화분이나 하나 들고 구경이나 와.”
창화는 매일 삼랑진으로 향했다. 이제 삼랑진에서의 동선이 예전과는 달랐다. 삼랑진역을 빠져나와 왼쪽으로 틀면 창화의 건물이 있다. 창화는 그 건물의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 하루 종일, 여기를 어떤 공간으로 만들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건물의 구석구석을 사진 찍고, 도면도 보면서 보내는 이 시간이 창화에게는 새로운 큰 즐거움이었다.
“하이고마… 우리 젊은 사장님 와 계셨네. 지나가다가 문이 열린 거 같길래…”
부동산 사장이 양손으로 올백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진관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참, 근데 여기서 뭐 하실라고예?”
“글쎄요… 아직 생각 중이에요.”
“뭐, 젊은 사장님이니까 잘 하실거라예.”
“근데, 사장님. 저번에 사진관 운영할 때는 여기가 아무나 와서 앉아있고 그랬다고 하셨죠?”
“맞심더. 지부터 이 근처 가게 사장들, 동네 사람들 할 거 없이, 시간나면 요 들어와 앉아가 차도 마시고 노가리도 까고 뭐, 그랬지예. 요가 동네 사랑방이었쓰예. 사진관은 다른 가게처럼 손님이 계속 오는 것도 아니라, 요가 딱 편했거든예.”
“예…”
“아참, 날도 더븐데 내 커피 한 잔 사올라니까 잠시만 기다리시소.”
부동산 사장은 창화가 사양하기도 전에 휑하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창화는 보고 있던 사진관 도면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30분 남짓이 지나서야 부동산 사장이 커피를 들고 사진관으로 들어섰다.
“하이고마… 인자 여름이네 여름. 여기 시원하게 커피 한 잔 드이소.”
부동산 사장의 올백 머리에서부터 땀이 얼굴로 흐르고 있었다.
“사장님, 왜 이렇게 땀을 흘리세요?”
“하이고마… 봄볕이 여름보다 더 따갑네예. 그라고… 요서 젤로 가까운 커피집이 걸어서 10분 좀 넘게 있쓰예. 그라고 보이 사진관 있을 때는 여가 다방이기도 했었네. 예전에 사진관 운영하시던 사장님이 월남전 참전 용사셨거든예? 사장님이 베트남 커피부터 미군들이 마시던 커피도 타주시고 그랬쓰예. 우리같은 촌 사람들한테는 신기한 맛이었지… 이래 사진관 안을 보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하네예.”
창화는 부동산 사장의 말을 듣더니 사진관 천장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사진관 노 사장님과 나눴던 대화들이 천장에 별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럼… 여기에… 카페가 생기면 참… 좋겠죠?”
“카페예? 하이고… 생기면 우리야 참 좋겠지예! 근데… 보시다시피 카페가 잘 될 자리는 아니라예.”
“굳이… 잘 되지 않아도… 괜찮거든요…”
“예에??”
부동산 사장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손님 오실 때가 다 됐네. 그라모 계속 일 보이소.”
부동산 사장이 돌아가자, 창화는 잠시 접었던 도면을 다시 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여기를 누구나 편하게 정차할 수 있는, 그런 카페로 만드는 거야!’
창화는 곧바로 부산으로 향하는 무궁화호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항상 가지고 다니던 검은색 크로스 백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자신이 생각하는 공간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미정은 상욱을 만난 후 이제 뭔가 해야겠다는 의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회사를 그만둘 때만 해도 아주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지만, 미정의 성격도 성격이거니와 하기 싫은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상욱의 모습을 보고 더 자극을 받은 것이다.
“죄다 옛날 거뿐이네… 내가 봐도 이건 너무 어리다.”
미정은 회사를 들어가든, 다른 일을 하든, 증명사진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예전 증명사진을 찾아보며 중얼거렸다. 한 회사를 오래 다녀서 그만큼 오랫동안 증명사진을 찍을 일이 없었던 미정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정리하고 집에 온 후로 하지 않았던 화장을 했다. 거울을 보며 한지에 그려진 서양화에 색을 칠해가는데 새삼 어색한 기분이었다. 마치 처음 화장을 하던 날처럼.
“매일 하던 걸 잠깐 쉬었다고 벌써 어색하네.”
습관이란 게 이렇게 얄궂다. 내가 길들인 습관은 금세 지워지다가도 남이 길들인 습관은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을 때가 있다. 미정은 지워졌던 습관을 되살려 화장을 마치고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증명사진에 어울리는 옷을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니 어데 가니? 내 몰래 선보나?”
“그런 기대는 마시고요.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미정은 차에 시동을 걸고 집 마당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니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아 차 안에서 표정도 지어 보았다.
“엥? 뭐야? 폐업?”
미정은 사진관 간판에 있는 번호로 전화도 걸어봤지만 없는 번호로 나오며 연결이 되지 않았다.
“엄마, 대현 사진관 문 닫았어?”
“뭐라카노? 거 문 닫은지가 언젠데. 니 서울가고 얼마 안 되가 문 닫았지 아마.”
“왜?”
“거 사진관 영감님 돌아가셨다 아이가.”
“어머, 진짜? 왜?”
“왜긴 왜고? 늙으면 다 죽는기지.”
미정이 사진관 사장님과 딱히 친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릴 적부터 사진을 찍으러 가면, 습관처럼 항상 계시던 분이었기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것도 다른 사람에 의해 얹힌 습관 같은 것이니까. 대현 사진관은 미정이 학창 시절 내내, 필요할 때마다 사진을 찍은 곳이었기 때문에 나름의 추억도 있는 곳이었다.
“하이고… 이게 웬일이야? 세상에 ‘아닐 미’에 ‘정 정’을 쓰시는 정 없는 분이 먼저 나한테 전화를 주시고?”
현주는 미정의 전화를 받자마자 농을 치기 시작했다.
“야, 내가 뭘 또 그렇게 연락을 안 했다고 그러냐?”
“야, 그럼 네가 연락했냐? 너 삼랑진 내려간 후로 나한테 먼저 전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거든?”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해?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얘야, 연락의 빈도는 관심의 척도야. 정 없는 네가 뭘 알겠니…”
“알았어. 알았다고. 그 빈도 앞으로 좀 늘리겠습니다.”
“음… 오늘따라 고분고분한데? 별일 없지?”
“촌에 있는 내가 뭐 별일이 있겠어. 근데 너… 대현사진관 알지? 우리 어릴 때부터 사진 찍었던.”
“응. 알지. 거기 엄청 오래됐잖아.”
“근데 여기 문 닫았어. 사장님이 돌아가셨대.”
“어머… 어떡해… 사장님 좋은 분이셨는데… 하긴, 나도 서울 온 뒤로는 그 사진관 근처도 안 가봐서 몰랐네. 그리고 아직 있었어도 요즘 누가 사진을 그런데서 찍냐? 더군다나 그 동네에 사진 찍을 사람도 이제 없지 뭐. 근데, 너 사진 찍으러 갔어?”
“아, 아니. 지나가다가 폐업이라고 붙어 있어서 엄마한테 물어봤지.”
미정은 현주에게 증명사진을 찍으러 갔었다는 걸 알리고 싶진 않았다.
“날도 더워지는데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시원한 집에 붙어있어. 그리고 나 이번 휴가 때 삼랑진 내려갈 테니까 어디 도망가지 말고 있어라.”
“휴가를 여기서? 왜? 해외여행이라도 가지.”
“그냥, 편한 내 동네 가서 쉬려고. 아무튼, 그런 줄 알아. 나 사무실 들어가 봐야겠다. 또 통화해!”
미정은 현주와의 전화를 끊고 사진관을 잠깐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이 작은 사진관 하나가 문 닫았을 뿐인데, 마치 큰 사건이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은 왜일까. 서울에서는 자주 가던 가게가 문을 닫으면 아쉬워하다가, 또 금방 다른 가게를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삼랑진에서는 이 작고 낡은 사진관 하나가 문을 닫았다는 사실이 서글프고 애가 쓰였다. 그리고 앞으로 이 동네에 이런 일이 점점 많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더 울적해졌다.
제11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최종심 선정작
소설 <내리실 역은 삼랑진역입니다> 출간
종이책: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870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