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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울림 Oct 22. 2020

#.10

주간 <임울림>

이야, 하얗게 펼쳐진 백지만이 구구절절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는 게 쓸쓸하고도 애석하다.


때는 2007년이었다. 당시 겨울에는 영하 17도를 웃도는 칼바람이 날 잡았다고 요란스럽게도 춤을 췄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반팔티, 셔츠, 조끼, 재킷(물론 바지도 입었다)만을 입고 학교에 등교했다. 교통비를 아끼겠다고 30분을 걸어갔는데 세상에, 교문 앞에서 머리를 쓸어 올리다 얼음 조각을 만졌다.


아침에 감은 머리카락의 수분이 얼어붙은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참 좋아라 했다. 마치 만화영화 속 주인공이 모험 중 시련을 겪는 거라고, 나는 철저하게 세상이라는 만화의 주인공이 되어 살았다.


어느덧 나이가 서른을 넘기다 보니 문득 더 이상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건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단지 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는 거니까. 그리고 그건 내가 타인과의 조화 속에 삶을 녹여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때 그 시절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나'라는 인간이 영하 17도에 스탠다드 세팅의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인간이었다면 어땠을까? 무모하고 아득한 시기가 그립긴 하지만 그럼에도 서서히 내가 서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 알게 돼 한편으로 안심이 된다.


너무나도 일상이 지루해서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나는 만화영화 속의 주인공이었다며 현실을 타박하며 주저앉아 울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이제는 만화 속 주인공보다 만날 호되고 우스꽝스럽게 저지당하는 악당이, 조력자가 더 잘 보인다. 감정이입이 잘 되는 게 참 묘하다. 그리곤 이렇게 생각했다.


어제의 관성을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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