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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울림 Nov 02. 2020

#.11

주간 <임울림>

현실과 이상의 괴리 앞에서 절망이 온다. 일을 하다가 나는 자주 절망에 빠지는데 그걸 번아웃이라고 하자.


사실 내가 번아웃에 빠진 이유는 최근 회사 컨설팅을 하는 박사의 발언과 쉼 없는 심리적 압박에서 비롯됐다. 박사는 일이 조직을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영철학의 부재에 허탈함을 자주 느꼈던 나는 주어지는 일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어느 날 박사는 지인의 회사 미디어팀에 우리 회사 기자 한 명을 파견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그 말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후 그가 덧붙였던 말은 '기자라는 말에 갇히지 말라'는 뉘앙스였다.


조직에 충성하라는 말은 아무래도 옛말이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신 보자 말자고 할 만큼 버티고 미련 없이 떠나고 싶을 만큼 하자, 라는 마음이 모래성이 돼 버릴까 두려웠다.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가진 단점이다. 경영진을 제외하고 평균 나이 삼십 대 초반인 이 회사에서 가장 필요한 건 '열정'이라는 단어다.

그럼에도 나는 해야만 하기에 휴가를 냈다. 12월 말일까지 써야 하는 연차 수가 열 개가 넘는다. 도망치듯 이천으로 내려갔다.


도예촌에 친구가 산다. 친구는 중고차를 뽑았고, 방사능에 노출된 계약직 일자리를 구했다. "야, 어떻게 하냐"라고 묻는 내 말에 뭐, 그냥 좋다고, 이렇게 사는 거라고, 파지 주울 각오도 돼 있다고. 그 말에 안도하는 내 마음을 이기적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내려놓게 됐다. 그간 내 마음이 쇠고랑처럼 차갑고 딱딱했다는 걸 인지했고, 아무것도 잃어버릴 수 없어 용감했던 지난 우리 시절을 기억했다. 모든 걸 비우면 비로소 새로운 걸 채울 수 있게 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발효시킨 차를 우리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도무지 워커홀릭으론 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 주광색 전구 아래 찻잔을 기울이는 시간이 아름답다는 걸 알고 있는 한, 나는 나를 일에 매몰시킬 수 없다.


그간 나를 돌볼 시간을 고려하지 못했다. 나를 돌봐야 남을 돌볼 수 있다. 조직을 자신으로 여기는 순간,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처절한 이들을 많이도 봤다.


세상엔 스스로 온전히 주인 되기도 부족한 시간이 흐른다. 나, 숭고하게 파괴되기보다 치열하게 살아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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