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행복? 행복은 무슨, 그냥 사는 거지.”라며 실소한다. 대개 자신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런데 행복한 적이 있었냐고 물어보면,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 과거 언저리를 더듬다가, 어느 한순간을 떠올리며 그때는 행복했었노라고 빙그레 미소 짓는다.
왜 행복은 현재형이 되지 못하고 언제나 과거형일까? 먼 훗날, 돌이켜보면 지금이 행복한 순간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과거는 사이사이에 끼어있던 괴로움이 모두 휘발된 채 즐거운 순간만 확대되어 추억이란 앨범에 남아있고, 현재는 기쁜 순간과 괴로운 순간들이 공존해 있어 딱히 불행하지는 아닌데 그렇다고 행복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미진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기쁘고 즐거운 일과 슬프고 괴로운 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까닭인지 기쁜 일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 듯하고 슬픈 일은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히는 것 같다.
얼마 전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공부를 잘했던 친구의 질녀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다녔는데 결혼하고 일 년 만에 이혼하고 말았다고 한다. 짧은 결혼생활에서 생긴 아이를 데리고 직장도 다니지 않은 채 10년째 친정에서 지내고 있어 오빠 내외는 노년을 한숨으로 보내고 있다며 한탄했다.
결혼과 연이은 이혼, 출산. 어느 누구라도 충격과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친구의 질녀 역시 당혹감에 이혼을 부끄러운 오점으로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는가? 살다 보면 이혼할 수도 있는 일인데 질녀는 큰 참사로 여긴 것 같았다.
내게도 이십여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역경이 닥쳐왔다. 내 소유라고 생각했던 집은 이미 오래전에 은행에 넘어가 있었다. 배신감과 분노로, 가난에 대한 공포와 내 우울이 아이들에게 전염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밤에 잠을 잘 수 없었고 두통과 복통에 시달렸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 집 주위를 매일매일 걸었다. 걸으니 혼란스럽던 생각이 점차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내게 생기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어쩌겠어? 그동안 내게는 운 좋은 일이 많았으니, 이제 나쁜 일도 겪을 수 있잖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해.”
나는 당장 직장을 구했고, 일을 하고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서서히 고통에서 벗어났다.
누구에게나 고난이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일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일은 점차 감당할 수 있는 일로 작아질 것이다. 친구 질녀에게도 처음에 이혼은 불행이 아니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일”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패배감에 사로잡혀 안으로 숨는 바람에 결국 가족 전체에 “불행한 일”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우리에겐 역경과 고난이 끊임없이 닥친다. 하나의 역경을 지나치면 우리에겐 또 다른 역경이 찾아오고 그것들을 딛고 다시 서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처럼 느껴진다. 입시 실패와 경제적 손실, 인간관계 배신, 건강 이상, 이별, 죽음... 그중에는 우리가 쉽게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큰 분노와 슬픔을 자아내는 것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 자체를 불행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지 않다. 그것은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 수도 있는 시련의 단계일 뿐이다. 시련은 그 자체보다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감정, 분노, 억울함, 슬픔 때문에 우리를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 휘몰아치는 감정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온전히 나를 지키면서 내가 처한 상태를 냉철하게 주시할 때, 무섭게만 보이던 그 시련이 내가 감당할 만한 것으로 작아지고, 비로소 맞서나 갈 힘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여기에 이르면 시련을 준 사건은 더 이상 내게 불행을 만들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시련을 극복할 수도 있고,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은 받아들이고 수긍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그러고 나면, 사건을 겪기 전보다 더 충만하고 성숙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일들 이를테면 합격, 승진, 내 집 마련, 결혼, 탄생과 같은 경사도 우리에게 행복의 감정을 느끼게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다. 합격과 승진의 순간 이후에 우리는 다시 경쟁에 시달리고, 내 집 마련 이후 금방 다시 더 큰 집을 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행복은 어떤 사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상황을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매사를 일희일비하지 않고 역경을 나의 불행으로 삼지 않고 의연히 대처한다고 해도 행복이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행복을 방해하는 또 다른 적은 바로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지겨움과 권태는 우리에게 무력감과 허무감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지금이 아닌, 여기가 아닌 어느 순간과 장소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공간도 언젠가는 하나의 일상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일상을 살만 한 곳으로 가꾸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각자가 가꾸고 있는 정원이다. 정원에 누군가는 먹고살기 위해 벼를 심고, 누군가는 화초를 심고, 누군가는 벼와 화초와 과수나무까지 골고루 심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이 시들지 않고 잘 자라도록 물과 거름을 줘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순식간에 자라 경작물을 덮쳐버리는 잡초도 부지런히 솎아내야 한다. 잡초는 우리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방심할 때 생기는 권태다. 재빨리 솎아내지 않으면 우리가 키우는 경작물의 자리를 빼앗고 우리 정원 전체를 점령할지도 모른다.
반백이 넘은 내 정원을 돌아본다. 주인의 요량 없는 씨 뿌리기 때문에 농작물과 화초가 구분 없이 자라고, 중간중간 텅 빈 자리는 잡초가 무성했던 곳으로 한때 주인의 게으름과 권태를 증명하고 있다. 그래도 나이가 든 만큼 정원을 지루하지 않게 가꾸는 요령도 생겼다. 내 정원 한 귀퉁이에는 오래 걸어 생긴 오솔길이 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그 길을 걷는다. 그 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활력도 얻는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벤치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한다. 적적할 때는 친구를 불러 함께 산책하며 수다를 떨기도 한다. 내 정원에 길이 생긴 이후, 권태는 더 이상 뿌리내리지 못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의외로 대단한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복병처럼 숨어있는 시련을 만날 때 그것에 휘둘려 불행한 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일상이 권태롭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 된다. 이 두 가지를 잘 지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즐겁고 유쾌한 여행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