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이란?

- 자기 위안이다.

by 라셀

어제저녁 8시 이후로 어떤 음식물도 들어가지 못해 쓰린 위장은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고무호스를 끊임없이 내뱉는다.

“자, 자, 구역질 나더라도 좀 참아보세요. 다시 넣습니다. 뱉지 마시고 꿀꺽 삼키세요.”

어떻게든 내시경을 집어넣으려고 애쓰는 의사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다. 하지만 내시경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입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의사는 그냥 수면내시경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그녀는 덜컥 겁이 난다. 수면마취 중에 기계가 위벽을 세게 치는 바람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다시 한번 해보겠다며 의지를 내비친다.

몇 번 더 시도 끝에, 드디어 기계는 철옹성 같은 목구멍을 뚫고 꾸역꾸역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위장은 쉴 새 없이 구역질을 해대지만, 이미 깊숙이 들어간 호스를 다시 뱉어내진 못한다.

힘든 검사 끝에, 의사가 내린 진단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다.

“식도염과 위염증세가 있습니다. 약 십일 분 드릴 테니 그래도 낫지 않으면 다시 오세요.”

그 말을 듣자, 허탈하다.

더부룩하니 소화가 안 된다고 느낀 지 달포가 넘었다. 소화제를 먹으면 좀 나았지만, 약을 끊으면 다시 속이 더부룩했다. 배를 눌러보면 뭔가 똬리를 튼 듯, 탱탱하게 만져졌다. 병원에 가보라는 식구들 말을 흘려듣다가, 이러다간 병을 키우지 싶어 어렵게 찾은 병원이었다.

그래도 큰 병이 아니라고 하니, 안도감이 든다.

갱년기 탓일 것이다. 최근에 괜히 불안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퇴직할 나이가 다가오는 남편 걱정에, 아직 취직을 못한 아들 걱정에, 탐탁지 않은 남자와 사귀는 딸 걱정에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면 부옇게 날이 밝아오기 일쑤였다. 틀림없이 스트레스로 인한 위염일 것이다. 괜한 걱정을 털어버리면 고장 난 위장도 다시 나아지겠지. 한 달 가까이 은근히 괴롭혔던 문제가 해결되니 머릿속이 안개가 걷히듯 맑아진다.


병원 밖은, 아직 한 낮인데도 날이 어둡고, 세찬 비까지 내리친다. 그녀는 겉옷을 우비처럼 쓰고 집으로 뛰어갈까 하다가, 병원 옆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산다. 항상 무언가 걸려 있는 것 같던 뱃속에 시장기가 돌았다. 오랜만에 맛있는 요리를 하고 싶어진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느긋하게 시장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시장 입구 광장은 평소 바닥에 벌여놓고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모두 철수를 했는지 텅 비어 있다. 빗물이 튀기는 바닥에는 검은 우산 하나만 덩그마니 놓여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달팽이처럼 우산 속에 몸을 웅크린 할머니가 주름진 앙상한 손으로 펼쳐놓은 물건에 비가 들이치지 못하게 막고 있다. 한 번도 난전에서 쑥이나 달래를 산 적이 없는 그녀다. 시멘트 바닥 옆에서 캤는지, 차량이 많은 도로 가에서 캤는지 출처를 모르는 야채는 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난전에서는 이미 한번 사용한, 쪼글쪼글 구겨진 검은 비닐봉지에다 나물을 담아줘 몹시 비위생적이었다. 그녀는 할머니를 보면서 사야 한다는 마음과, 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서로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

그 날 그녀가 그 할머니를 지나치지 않은 것은, 위내시경 결과와 무관하지 않았다. 혹시 암일까 얼마나 걱정했던가. 자신이 오늘 받은 행운의 결과를 마땅히 궂은 날씨에도 장사를 해야만 하는 이 불쌍한 할머니와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설사 사놓고 먹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야 한다는 압박감이 든다. 그녀는 할머니가 펼쳐놓은 물건들을 재빨리 훑어본다. 그리고 나물이 아닌 여러 가지 콩이 섞여 있는 봉지를 선택한다. 그런데 강낭콩이며 완두콩이 갓 수확한 듯 싱싱하고 통통해 보인다. 분명 작년에 작년에 수확한 콩일 텐데 이상하다.

“이거 내가 가을에 말려놨다가 다시 불려서 갖고 온 거여.”

중국산인지 잠시 의심했던 그녀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세 봉지를 집어 들며 한 봉지에 사천 원만 달라는 할머니에게 이만 원을 드린다. 잔돈을 거슬러 주려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뜨는데 왠지 마음이 따뜻해져온다. 빗속에서 장사ㅔ하는 불쌍한 할머니에게도 분명히 따뜻함이 전해졌을 것이다.


시장 아케이드 입구 쪽에 들어설 때 그녀는 갑자기 뒤돌아본다.

그 사이 날이 개고 비를 피해 있던 다른 행상인들이 다시 광장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각자 자리에 짐을 풀어놓고 도시락을 들고, 하나둘 할머니 옆에 자리를 잡는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할머니는 구름 속에서 나온 햇살처럼 밝고 환해 보인다.

저 할머니가 불쌍하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장사하는 할머니. 굽은 허리 펴지도 못하고, 열무를 깎거나 도라지 껍질을 벗기는 할머니. 그렇다, 그녀는 불쌍하다. 하지만 팔십은 족히 넘어보이는 그 할머니에게 어느 누가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 깨끗한 마트가 아니라 난전에 있는 그녀에게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은 물건 값을 깎기는커녕 하나라도 더 팔아주려는 정많은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다.

친절한 고객을 다수 확보하고, 같이 점심을 나눠 먹을 동료도 있는 그 할머니보다 과연 네가 더 행복할까? 비오고 바람부는 날씨에도 끄덕없이 장사할 수 있는 건강한 할머니보다 만성적으로 위염을 앓고 있는 네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슨 오만이며 착각인가?

그녀는 할머니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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