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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각자의 영화관 Aug 14. 2024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한다면

Another Round(2020)


노르웨이 철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핀 스코르데루는 음주가 현명하댔어. 인간의 혈중 알코올 수치가 0.05% 부족하단 거야.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로 유지되면 더 느긋해지고, 침착해지고, 음악적이고, 개방적으로 변한대. 결국 더 대담해진다는 거지.

- Another Round(2020)



아끼는 예쁜 유리잔에 얼음을 가득 담고, 약간의 위스키와 탄산수를 따라 넣었다. 두 달 전 교토에서 사 온 위스키는 여름과 어울리는 은은한 청사과향이 난다. 본래 위스키라면 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니트로 마시는 것을 선호하지만, 천천히 마시고 싶을 때는 온더락이나 하이볼로 마시기도 한다.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입술에 닿는 찬 기운과 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가 기분 좋다. 탄산수에 섞여 옅어진 위스키 향이 코끝에 감겨오면, 조금 더 느긋해진 기분으로 글을 적을 수 있게 된다.


“술이 왜 좋아요?”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핀 스코르데루의 가설과 일치한다. 가설에 따르면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의 인간은 불완전하며, 모자란 알코올 농도가 채워진 후에야 비로소 완전해진다. 평상시의 나는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어색한 상황이라면 손을 덜덜 떨 만큼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난 뒤에는 여유롭고, 쾌활하며, 대범해진다. 그러니까, 술이란 서툰 나를 쿨한 인간으로 완성시켜 주는 마법의 묘약 같은 것이다. 알코올에게 빌린 자신감은 잠들기 전까지는 유효하다. 그 순간만큼은 낯선 이와도 거리낌 없이 웃고 떠들 수 있다.



문득 여행지에서 술과 함께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도쿄에 갈 때마다 들르는, 서너 명 들어가면 꽉 찰만한 비좁은 바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이 있다. 골목 초입의 라멘집에서 니보시 라멘 한 그릇과 함께 맥주를 마신 뒤, 귀여운 간판이 빼곡히 들어찬 좁다란 길을 걸었다. 하루를 멋지게 마무리할 최적의 장소를 찾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이곳저곳을 들여다보았다. 앙증맞은 그림이 그려진 가게에는 자리가 없고, 그 옆 가게는 너무 밝고, 또 어떤 가게는 마스터의 인상이 험악하다. 골목을 한 차례 다 돌고도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해 지나온 길을 다시 되돌아 걸었다.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입구에 귀여운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나 있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반투명 유리로는 안이 보이지 않아 조금 걱정되었지만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가게 안은 어둡고 작지만 묘하게 따스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우리를 반기는 사장님의 상냥한 미소에 안도하며,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러 종류의 내추럴 와인을 잔술로 맛볼 수 있는 가게였다. 와인 몇 잔을 시켜 홀짝이다가 옆자리 손님들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황급히 시선을 피했겠지만, 알코올로 무장한 나는 멋쩍은 미소로 화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수줍게 인사를 건넨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가게 안의 모든 이들이 친구가 되어 함께 떠들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식문화에 관심이 많다는 호주인 친구에게 독특한 음식을 파는 식당을 추천받았고, 사장님은 즐겨 찾는 빈티지 샵의 구글맵 링크를 에어드롭으로 잔뜩 보내주었다. 토성의 공전 주기와 아홉수의 개념이 유사하다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동양의 명리학과 서양의 점성술을 비교해보기도 했다. 제각기 다른 언어가 마구 뒤섞여 반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눈빛과 손짓으로 공감하고 함께 웃었다.


초상권 보호를 위해 블러 처리한 그날의 단체 사진. 모두가 K-하트를 만들고 있다.


후쿠오카의 시골집 숙소에서 만난 대학생들은 한국 막걸리를 나누어주었고, 삿포로 낡은 바의 할아버지 마스터는 젊은 시절 바텐더 역할로 영화에 출연했던 이야기를 자랑스레 들려주었다. 파리에서 지낼 때 종종 들르던 건과일 가게의 주인아저씨와 카운터에서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시며 불어를 배운 적도 있다(기억에 남는 거라곤 ‘Je ne parle pas français’ 뿐이지만). 우연히 한 공간에 모인 낯선 이들에게 술기운과 여행의 설렘을 더해 칵테일처럼 휘휘 젓는다. 모두에게 잘 섞인 근사한 추억이 한 잔씩 돌아간다.




글쓴이 : 서울의 S

틈만 나면 어디론가 훌쩍 떠날 계획을 세우는 브랜드 디자이너. 매일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는 현실주의자이지만, 동시에 먼 곳의 낯선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영화와 여행의 공통점은 비일상의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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