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사랑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할머니'라 답할 것이다. 나는 세 할머니에게 사랑을 배웠다. 마침 할머니 손에 자라고 운이 좋게 할머니 절친이 있는 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 영화감독을 가장 좋아한다. 지금도 그녀들에게 영화적 삶과 인생의 태도를 익힌다. 이 글을 통해 생각만 해도 애틋한 그녀들에게 너무 늦지 않게, 나의 마음을 고백해 두려 한다.
경주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우리 외할머니는 나의 가장 많은 통화 상대이자 손바닥만 한 밭에서 온갖 작물을 기르는 자급자족의 달인이다. 된장, 고추장 등 장 담그기가 취미이고 주로 욕을 섞어 나이 먹은 손녀를 타박하는 것이 특기인 미운 여든일곱 살. 경상도 사투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전혀 애정을 느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괴팍한 말투 안에 담긴 우리 할머니의 사랑을. 바람 불면 날아(?) 갈까, 눈 오면 엎어질까, 비 오면 젖을까. 섬으로 훌쩍 떠나버린 손녀의 일상을 염려하며 할머니는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나에게 전화를 건다.
제주 여성영화제에서 관람한 '할머니의 먼 집'(2016)은 우리 할머니를 참 많이 떠오르게 했다. '할머니의 먼 집'은 고독함에 자살을 시도한 아흔셋 할머니의 소식을 들은 이소현 감독이 할머니의 집이 있는 화순을 오가며 만든 가슴 먹먹한 다큐멘터리다. 화면 가득 펼쳐지는 할머니의 미소, 감독과 할머니의 대화는 오랫동안 나를 울렸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두 주인공이 누워서 꼭 끌어안는 포옹씬이었다.
내가 또 알지, 포근한 그 기분. 콤콤한 냄새를 맡으며 할머니 품에 안겨 있다 보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잠시 잊게 된다.
나의 절친 K선생님은 제주에서 노년을 즐기고 있는 일흔 언저리의 할머니다. 선생님은 서예와 무용 등 예술에 조예가 깊고, 인문학과 정치 등 세상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실제로 우리나라 1호 여성 다이버이기도 한 그녀는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모르는 것들을 또 모두 알고 있다. 제주 입도 초반 선생님과 두 개의 방과 거실이 있는 구옥에서 1년 정도 함께 살 기회가 있었다. 퇴근 후 선생님이 만든 맛있는 음식과 술을 곁들여 식사를 하고, 같이 영화와 드라마도 많이 봤다. 선생님의 수많은 카세트테이프 중 하나를 골라 음악을 틀고, 이 가수는 어땠으며 이 배우는 어땠는지 하는 옛날이야기에 꽃을 피우던 밤들이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영화 같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특히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눴던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나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가 그렇게 재밌는 작품인지, '일 포스티노'(1994)와 '아이리시 맨'(2019)이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지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전혀 알지 못했을 거다.
내가 아녜스 바르다를 알게 된 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8) 덕분이었다. 귀여운 분홍 머리가 시선을 사로잡고, 주변 모든 것을 영화로 만드는 긍정적이고 에너지 가득한 아티스트. 여든이 넘은 할머니의 얼굴에 어쩜 저리 장난기가 가득할까. 재밌는 이슈가 생기면 그녀는 뒤돌아서 이 사건을 빨리 영화로 만들고자 다짐한다. 감독이 타계한 2019년, 나는 부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의 전당 회고전을 통해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1988),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2008) 등을 큰 스크린으로 음미할 수 있었다. 현재 감독은 떠났지만 다행히 그의 작품은 건재하게 남아 있다. 그의 고전 영화를 찾아보며 사랑스러운 그녀뿐 아니라 그녀의 영화관(觀)과도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좋겠다.
친구들과 우린 어떤 할머니가 될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첫 번째로 아녜스 바르다를 떠올렸다. 그리고 K선생님과 우리 외할머니를 차례로 생각한다. 그녀들과 나의 삶은 대체로 다르겠지만, 틀림없이 닮아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세 할머니가 되도록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러주길. 그들의 사랑에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담아 글을 마친다.
글쓴이 : 제주의 Y
제주에서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며 산다. 예술학교의 광고학도로 기획이나 마케팅 등을 접하고, 육지에서 짧게 독립영화사 인턴과 영화제 스태프로 일했다. 언젠가 본인이 사랑하는 제주섬에도 좋아하는 영화관이 생길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