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영화관 문화
최근 영국 영화관 업계는 더블빌(Double Bill)* 유행을 이끌었던 바벤하이머 —‘바비’(2023)와 ‘오펜하이머’(2023) — 그리고 ‘듄: 파트2’(2024) 개봉 이후 코로나 이전과 거의 비슷한 수익을 기록하며 점차 정상화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영국과 한국 관객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이들에게는 영화관을 가는 것이 생활습관과도 같은 하나의 루틴이라는 것인데, 이에 비해 한국은 영화가 재밌어 보여야지만 영화관에 가는 것 같다. 오늘은 지난 몇 년간 살면서 경험한 런던의 영화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더블빌(Double Bill): 보통 영화 두 편을 동시상영할 때 쓰는 말. 이 글에서는 영화관에서 하루에 두 작품을 감상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멤버십 시스템
이건 영화관에만 국한된 건 아니고 영국 전반적 사회 문화인데 한국과는 달리 영국은 멤버십 문화가 매우 발달해 있다. 이에 대부분의 영화관이 멤버십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보통 나이에 따라 학생(혹은 under 25)/일반 회원으로 구분하고 기간은 주로 1년 단위다. 가끔 평생회원을 모집하는 영화관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나도 한때 런던의 독립 영화관인 Prince Charles Cinema의 연간 멤버십을 가입하기도 했다.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가입하는 멤버십에는 보통 무료 티켓이 몇 장 포함되어 있고 추후 티켓 구매 시 할인, 음료 및 스낵 할인 등 혜택이 제법 괜찮아서 자주 가는 영화관이 있다면 가입하는 것이 이득이다. 간혹 멤버만 이용 가능한 라운지를 가지고 있는 영화관도 있는데, Picturehouse Central의 멤버스 바는 피카딜리 서커스에 위치한 건물 고층에 있어 멋진 뷰를 자랑한다.
주류 판매
한국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아마 ‘술’이 아닐까. 한국도 맥주를 파는 영화관이 종종 있지만 여기는 대부분 본격적으로 와인과 칵테일도 판다. 아무래도 술이 저렴하진 않기 때문에 부어라 마셔라 분위기는 아니지만 은은하게 혈중 알코올 농도를 유지하는 느낌이다. 물론 간혹 취객도 나오기는 한다.
음식도 거의 식사 급으로 다양하게 파는 영화관이 많다. 가볍게는 팝콘부터 아이스크림, 피자, 핫도그 등 한국에서는 냄새날까 봐 걱정하는 햄버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영화관 내부에서 판매하지 않는 음식의 입장은 금하는 편.
큰 리액션
관크를 극혐하는 한국인 기준, 영국의 영화관은 솔직히 산만하다. 일단 술을 마시며 관람하는 경우가 많고 음식도 별 걸 다 팔다 보니 기본 세팅 자체가 시끄러운 환경인 데다가 영화를 보며 크게 웃는 게 실례가 되지 않아서 깔깔대고 웃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끔 지나치게 신난 관객이 ‘대체 여기서 왜 웃지?’ 싶은 심각한 장면에서 웃으면 머릿속에 거대한 물음표가 뜨지만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한다. 나도 술을 더 사 올 걸 후회하면서 말이다.
반면에 그래서 즐거운 영화를 볼 땐 더 재밌기도 하다. 웃음은 전염성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웃기 시작하면 별 것 아닌 영화도 굉장히 즐거워진다. 영국에서 가장 즐거웠던 관람 경험 중 하나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이었다. 3대 스파이더맨을 모두 보며 자라온 나에게 ‘그’ 장면이 나왔을 때 영화관에서 다 같이 환호하던 순간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아마도 한국에서 관람했다면 나도 그렇게까지 소리 지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런던의 한 영화제에서 본 눈물 나게 웃긴 단편영화가 넷플릭스에도 올라와서 친구들과 같이 관람했을 때는 생각보다 별로 재미가 없기도 했다. 분명 영화관에서는 관객들 다 같이 웃다가 눈물을 흘렸는데… 이 자리를 빌려 애매하게 웃긴 단편영화를 함께 관람해 준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를 보낸다.
넓은 관객층
영국은 관객층이 상당히 다채롭다. 주로 젊은 친구들이 많지만 50-60대 관객도 제법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취향 또한 꽤나 다채롭다. 한국으로 치면 영화진흥위원회와 유사한 영국의 영화 기관인 British Film Institute(BFI)의 2019년 통계 자료를 보면 45-54세 연령 그룹과 55세 이상의 연령 그룹이 영화관에서 본 영화 상위 10편 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가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45-54세 연령 그룹 리스트에는 ‘미드소마’도 있었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를 많이 보는 중장년층이라니, 너무 색다르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물론 언어나 취향의 차이도 있겠지만 중장년층의 관객들이 친구들 또는 가족과 함께 영화관에 와서 아트하우스 영화를 보고 영화 감상을 나누는 모습은 분명 참 보기 좋았다.
프로그램 다양성
이곳의 차이라면 좀 더 다양한 영화를 길게 상영해 준다는 것. 보통 평균적으로 한 달 정도는 영화를 상영하는 분위기라 시간 여유가 있어서 나도 느긋하게 영화를 보러 가곤 한다. 한국에서는 사실상 개봉 첫 주차에 상영관 수가 결판이 나다 보니, 영화의 홍보 마케팅팀은 개봉 주에 최대한 스코어를 터뜨리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특히나 작은 예술영화의 경우, 개봉 주에 놓치면 이후에는 극악의 스케줄을 자랑하기 때문에 영화관에서 관람할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런던은 그래도 아직까지는 한국에 비해 많은 독립 영화관이 있고, Picturehouse, Curzon 등 비교적 큰 독립 영화관 체인은 직접 예술영화를 수입해 배급에 나서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최소 하루에 한 슬롯이라도 장기적으로 걸어주기 때문에 더더욱 상영 기간이 길어질 수 있는 환경이랄까. 이것도 결국은 배급과 수입의 연결이라 이 방향이 옳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관 별로 자체 큐레이팅한 영화를 틀어주는 특별 프로그램도 꽤 자주 만나볼 수 있다. 한 감독의 유명 작품들을 상영하는 특별전이라든지, 시리즈 영화의 연속 릴레이 상영이라든지, 오래된 영화의 재개봉전이라든지. 지난 5월 4일, 스타워즈 데이(Star Wars Day)*에는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이 개봉 25주년을 기념해 재개봉해 런던 곳곳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Pride의 달을 맞이해 퀴어 영화를 상영하는 등 시즌별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편이다.
*스타워즈 데이(Star Wars Day):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May the Force be with you(포스가 함께하길).”라는 유명한 대사와 날짜 5월 4일(May the 4th)의 발음이 유사해 매년 5월 4일은 스타워즈 데이로 불린다.
TMI지만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영국은 유독 Cinema(영화관)와 Theatre(극장)의 단어 구분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공연이나 연극, 뮤지컬 등을 상영하는 극장은 Theatre로,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Cinema로 나누어 사용한다. 반면 미국의 경우, 한국과 유사하게 Cinema/Theater 둘 다 영화관으로 혼용해서 사용한다. 아무래도 영국은 공연 문화가 발달해서 확실한 구분을 위해 표현이 굳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향유하는 문화에 대한 계급적인 이유도 있을 것 같은데 이는 얘기하자면 주제에서 벗어날 것 같아 이만 마무리하겠다.
모든 것에는 각자의 취향이 있고 어느 문화가 낫다기보다는 이러한 차이점이 있구나 정도로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재밌는 영화는 영국에서 보는 것을, 집중해서 봐야 하는 영화는 한국에서 보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IMAX는 한국 용아맥이 최고다. 아무튼 모쪼록 한국도 어서 영화관이 정상화되기를, 한국에 더 많은 취향을 가진 다양한 지역 독립 영화관들이 생기고 이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글쓴이 : 런던의 D
런던에서 영화 주변을 기웃거리며 살고 있다. 한국에서 영화 홍보마케팅 일을 했으며 영국에서 미디어와 관련한 짧은 공부를 마쳤다. 현재는 영화제, 영화관 등 영화 관련된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