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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각자의 영화관 Aug 21. 2024

작고 아름다운 나의 노란 집


보자마자 머무르고 싶은 공간이 있다. 들어서는 순간 나의 취향을 저격하거나, 주인장의 취향이 드러나거나. 그 접점이 넓으면 넓을수록 이곳에 온 목적은 잊고 정신을 살짝 놓게 되기도 한다. 어떤 영화들도 그러했다. 빛나는 미술이나 인테리어 덕에 더 좋은 인상을 갖게 되는 작품들.


바로 떠오르는 영화는 '애프터 양'(2021)과 '어나더 라운드'(2020)이다. '애프터 양'은 플랜테리어와 은은한 톤이 돋보이는 공간이 눈길을 사로잡고, '어나더 라운드'에 얼핏 얼핏 나오는 주인공들의 집들은 역시 덴마크(!)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가구와 인테리어가 예술 그 자체였다.


‘애프터 양’(2021) 스틸컷


나도 서귀포시 어드매 작은 시골집(a.k.a. 노란 집)에서 소소한 인테리어 욕망을 실현시킨 적이 있다. 그곳은 제주에서 살게 된 다섯 번째 집이었고, 연세 100만 원이라는 충격적인 금액이었지만 변기가 없었다. 더불어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는 허름한 집이었으니 혼자 들어가 살기엔 덜컥 겁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집 안에 첫 발을 딛는 순간부터 뭔가 신비한 느낌이 들면서 여기다 싶은 강렬한 직관이 나를 사로잡았다. 키 작은 나의 시선에 꼭 맞는 창문의 높이, 유니크한 무늬의 바닥, 듬성듬성 멋대로 박힌 못들의 위치까지. 변기만 있으면 되겠는데? 싶은 마음이 들자 솟아오른 걱정과 불안은 금방 사소해졌다. 언제 시골집에 살아보겠어, 연세가 엄청 싸니 변기는 놓고 들어가면 돼, 동네가 또 고즈넉하잖아.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나는 결국 노란 집의 세입자가 되었다.



생전 처음 도배를 신청하고 방충망과 커튼도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설치했다. 주인 할머니가 오수관 비용을 부담해 주셔서 무사히 변기도 놨다. 냉장고와 세탁기, 에어컨 등 그전까지는 소유해 본 적이 없던 가전을 하나씩 구매하며 로망이었던 소파도 두고,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고가구를 주방으로 옮겨 좋아하는 식기들을 차곡차곡 사 모아 진열했다.



공간을 채워나가며 참 신기했던 건 원래 가지고 있던 나의 소품들이 노란 집과 정말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뭔가 빈티지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이 모두 이곳을 꾸미기 위한 것이었나 싶게 딱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사부작사부작 그곳에서 5년의 세월을 보냈다.



지금은 꽃 이름을 가진 노란 아파트로 이사 왔다. 그 시절, 노란 집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두렵고 번거롭단 이유로 그곳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마 진작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제주를 떠나버렸겠지. 혹은 버거운 연세에 쫓겨 인생의 많은 부분을 놓친 줄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흘러가며 지냈을 거다. 어떤 공간은 어떤 이의 삶을 제법 기특하게도 만든다. 작고 아름다운 나의 세계, 그리운 노란 집에 아직도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글쓴이 : 제주의 Y

제주에서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며 산다. 예술학교의 광고학도로 기획이나 마케팅 등을 접하고, 육지에서 짧게 독립영화사 인턴과 영화제 스태프로 일했다. 언젠가 본인이 사랑하는 제주섬에도 좋아하는 영화관이 생길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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