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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각자의 영화관 Sep 04. 2024

장면 수집

파리로 가는 길(2016)


눈앞의 아름다운 장면을 잘라내어 수집하는 일을 사랑한다. 마음을 사로잡는 광경을 목격한다면 지나가는 순간을 망설임 없이 재빠르게 붙잡아야 한다.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도 실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가령,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은 움직임 없이 그대로 있지만 창으로 들어오는 볕의 길이가 달라지면서 그림자의 모양과 색이 바뀐다. 아주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이 되고 만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2016) 의 주인공 ‘앤’은 예상치 못한 여정 내내 작은 라이카 카메라와 함께다. 접시 위의 초콜릿, 와인잔의 표면, 나뭇잎 그림자, 시장에 진열된 고깃덩어리, 전시된 작품의 일부분 등 그녀가 포착한 작은 조각들이 모여 이야기를 만든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도 보여준 적 없던 사진들이지만, 여행이 끝나갈 무렵 찍은 사진들을 보여달라는 ‘자크’에게 멋쩍게 카메라를 내민다.


“사소한 것들을 잘 잡아내네요. 영감이 넘치는데요?”
“그래요?”
“다 보여주지 않으면서 전체를 상상하게 만들죠.”


파리로 가는 길(2016)


일단 카메라를 손에 들면 지나치기 쉬운 작은 디테일들, 빛과 그림자의 미묘한 변화, 순간적인 표정이나 동작을 포착하려 노력하면서 일상을 더욱 섬세하게 관찰하게 된다. 영화 속 ‘앤’처럼, 나도 널찍한 풍경보다는 좁은 화각 안에서 뜻밖의 이미지를 찾아내는 쪽을 더 좋아한다. 빛과 함께 겹쳐진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조형적인 형태를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보기 좋을 만큼 오려내어 본다. 이미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간단하면서도 짜릿하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한데 모아놓고 보면 뷰파인더 뒤의 사람이 어떤 시선을 가졌는지가 눈에 보인다. 미적 취향뿐만 아니라 당시의 경험, 감정, 분위기가 반영되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기도 하다.


요즘처럼 빛 좋은 계절에는 반짝이는 장면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마음에 드는 순간을 만나면 신속하게 셔터를 누르고, 그 중 몇 장을 신중히 골라 차곡차곡 모아두자. 결과물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 매일의 순간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모아가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여정이 된다. 그렇게 수집한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 다시 들여다볼 때 더욱 의미 있다. 먼 훗날 꺼내 볼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글쓴이 : 서울의 S

틈만 나면 어디론가 훌쩍 떠날 계획을 세우는 브랜드 디자이너. 매일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는 현실주의자이지만, 동시에 먼 곳의 낯선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영화와 여행의 공통점은 비일상의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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