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와 제주의 바다
수많은 영화 속 바다와 해변, 파라솔의 풍경을 상상해 보자. '애프터썬‘(2023) 소피의 바다, '해변의 폴린’(1982)과 '여름이야기‘(1998)의 싱그러운 여름 방학, 아름다운 수영복을 입은 '투 라이프’(2015) 주인공들의 모습 등 누구든지 영화를 통해 멋진 여름날 한 장면쯤은 간직할 수 있다.
1년 전,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다짐했다. 2024년 여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주 바다를 마음껏 누리겠노라고.
10년 가까이 제주도에 살았지만 제대로 바다를 즐긴 기억이 별로 없다. 항상 바쁜 근로자였으니 쉬는 날이 되면 더위와 피로를 피해 바다보다는 침대를 택했던 까닭이다. 종종 육지의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놀러 오면 구경을 가긴 했지만 스스로 바다를 찾아야겠다는, 수영을 하고야 말겠다는 결심 같은 것은 딱히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작년 여름, 유럽의 마을 몇 군데를 다니며 바다 수영의 참맛을 알게 됐다.
2023년, 몇 개월 동안 유럽에 머물며 프랑스 남부 작은 해변마을 까시스나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등을 여행했다. 특히 시칠리아는 제주와 참 많이 닮은 곳이었다. 에트나 화산을 비롯해 선인장과 야자수, 현무암과 바다까지. 다른 나라에서 이렇게 제주도가 생각난 적이 없었는데 시칠리아는 정말 특별하고도 신비했다.
시칠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카타니아와 아그리젠토, 타오르미나, 시라쿠사 등 섬의 동남쪽을 야무지게 즐기며 친구들과 나는 거의 매일 바다로 갔다. 해변에서 싸고 맛 좋은 와인을 잔뜩 마시고, 피자와 맥주, 과일 등을 먹었다. 맑고 깊은 지중해를 한참 떠다니다 뭍으로 돌아와서는 슬그머니 옆자리 할머니 파라솔 그늘에 빚져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새삼 깨달았다. 나는 바다 수영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바다가 지천에 널린 제주에 살면서 왜 만끽하지 못했을까, 지난 여름날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들면서도 곧 만나게 될 제주 바다가 기대되어 가슴이 너무 설레었다.
여행을 마치고 제주에 돌아와서는 제일 먼저 초록빛깔의 파라솔을 샀다. 그리고 도내 유명한 포구와 작은 해변, 용천수 등을 찾아 지도에 찍어두었다. 눈 깜짝할 사이 두 계절이 지나가고, 마침내 나는 2024년 제주의 여름을 맞이했다.
낮이고 밤이고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정말 짬이 날 때마다 바다로 갔다. 작은 차에 파라솔과 와인을 싣고, 마치 한이 맺힌 사람처럼 온몸을 내던져 수영을 했다. 피부가 까맣게 타버려도 상관없었다. 88KEYS의 <swimming> 노래 가사처럼 '다른 것은 보지도 않고, 눈 감은 듯이 헤엄을 치는' 그런 나날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공기를 마주하며 나는 또 한 번 다짐한다. 내년 여름도 제주 바다를 제대로 즐겨보겠노라고. 벌써부터 즐겁고 자유롭다. 행복으로 가득 찬 작은 부표가 나의 마음속을 둥둥 떠다닌다.
글쓴이 : 제주의 Y
제주에서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며 산다. 예술학교의 광고학도로 기획이나 마케팅 등을 접하고, 육지에서 짧게 독립영화사 인턴과 영화제 스태프로 일했다. 언젠가 본인이 사랑하는 제주섬에도 좋아하는 영화관이 생길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