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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VILLAGE Apr 07. 2022

고독한 인간의 곁에는...




 지금 나의 발치에는 하얗고 뜨끈한 생명체가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다. 책상 아래 둔 발매트는 이 아이의 차지가 된 지 오래다. 뜨문뜨문 코를 고는 것과 비슷한 진동이 울리고, 나는 그 소리가 마냥 정겹고 귀엽다. 내가 먹을 걸 가져와 부스럭거리면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촉촉한 코를 들이민다. 그럴 땐 아주 민첩해서, 낮잠을 자는 따끈한 모습과는 반전되는 매력이 있다. 우리집 강아지 밍키에 대한 이야기다.


 한때는 밍키를 중앙공원에서 산책 시키고 집으로 돌아와, 언제나처럼 오리고기 순살텐더를 건네면서 생각에 빠졌었다. 그날따라 유독 공원 호수 근처를 오래 돌았고, 호수에 살고 있는 오리 가족을 가까이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밍키는 오리를 보고 짖지 않았고 오리는 밍키를 보고 도망가지 않았다. 평일 오후의 한적한 동네 공원에서, 강아지와 오리는 잠시나마 같은 흙을 밟고 같은 바람을 맞았다. 거기엔 물론 나도 있었다.



 반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때면 인간의 외로움과 고독함, 그리고 불완전함이 떠오른다. 한때는 시혜적인 느낌으로 '반려'를 생각했던 적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건 길에서 작은 고양이를 만났을 때, ‘엄마, 저 고양이 추워 보이니까 우리가 집으로 데려가서 따듯하게 해주자!’ 라고 말하던 어렸을 적에. 무언가 더 윤택하고 안락하게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위 계급의 동식물을 거두어 돕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로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행위해야 한다는 측면을 생각하면 이런 반려의 개념도 일면 맞을 수 있겠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인간이 자신 옆에 반려동물, 식물을 두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독하기 때문이다. 모든 가구가 갖춰 들어오고 직업과 생활이 안정되었음에도 홀로 집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쓸쓸함. 우리는 이 쓸쓸함을 채울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다. 나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이고 절대로 배신하지 않으며 촉촉한 코와 보드라운 털을 가진 존재를 집에 들이는 방법이다. 털이 자라지 않는 돼지도, 꽥꽥 소리를 내는 오리도 당신에게 똑같은 사랑을 줄 수 있겠지만 당신은 기왕이면 귀엽고 예뻐서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그 외견이 가진 특성으로 ‘사랑하기 쉬운’ 강아지 고양이를 선택한다.


 반려동물이라 칭하고 집에 들여와 먹이고 재우고 산책하고 교감한다. 우리 집을 포함한 많은 집들이 그렇게 한다. ‘반려’이기에 당연하게도, 반려동물의 삶의 질은 그 집의 생활수준과 꼭 같아진다. 백화점에선 유기농, 100% 캐시미어, 프리미엄 소재 등의 키워드로 자기네 제품을 홍보하고 5만 원짜리 애견 옷을 팔며 그걸 사다 입히는 견주들이 있다. 넓은 마당과 놀이 시설을 갖춘 신축 강아지 유치원은 한 달에 50만 원을 받고 강아지 필라테스, 사회화, 노즈워크를 시켜주는데, 매달 이런 곳에 등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매일 같은 사료를 먹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불 꺼진 거실에서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보내는 강아지, 고양이들도 있다. 방치되고 학대를 당하는 사람이 있듯이 방치되고 학대를 당하는 반려동물들도 수없이 많다.


 다시 한번 반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역시나 떠오르는 건 인간의 고독이며 그 위에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넉넉한 휘핑크림처럼 올라간다.


 예전에 고양이를 키우다 동물의 생명력을 가까이서 느꼈고 그 일을 계기로 채식을 시작했다는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뭔가 뭉클했으나 동시에 의뭉스러웠다. 동물을 전시해 구경하는 행위가 폭력적이라고 동물원이 얼마나 비윤리적인 장소인지 설교했더니 그걸 듣던 상대가 집에 애완동물 키우는 사람이 할 말은 없지 않냐며 비꼬았을 때 찾아온 정적을 기억한다.


 반려가 더 좋게 나아갈 방향이 있을까? 반려동물, 식물을 대하는 문화적 태도는 이미 더 할 나위 없이 근사하다. 강형욱 아저씨가 나와서 강아지의 심리에 대해 심층적으로 말해주고 솔루션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은 티브이를 켤 때마다 방영 중이다. 강아지, 고양이를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 식구로써 생각하고 귀히 다뤄야 함은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도 알고 계신다.



 인간은 세상 모든 사물에 대해 이기적인 태도로 선택을 하고 신중하게 자신의 것을 취한다. 식물을 들일 때도 마찬가지다. 선택을 잘 받은 강아지, 고양이, 레몬 트리는 행복하게 윤택하게 살 거다.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한나절 고민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모순이다. 이럴 땐 철학서를 펼치고 싶어진다. 최근에 읽은 한 책에서 개를 키우는 것에 인간이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담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봤다. 결국, 개나 고양이를 가족처럼 여기고 그들과의 유대가 사람 간의 유대 못지않게 진실되고 뜨끈하다고 느낄수록, 즉 인간이라고 더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을수록, 타인을 대할 때에도 평등하다는 얘기였다. 반대로 동물을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대하는 사람일수록 인간 사회 속에서도 사회 지배 성향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이 이야기는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대하는 태도가, 그런 다정함에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증명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얘기로는 나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강아지를 나의 가족으로써 평등하게 대한다면, 그로써 아름다운 마음씨가 자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지 않은 다른 동물 종은 무엇 때문인가?








Editor & Contents Director : 송 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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