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시작에 앞서 이번 글에서는 '동물'과 '인간'이라는 단어를 분리해서 사용할 것임을 밝힙니다. 인간도 동물의 일종이기에 원칙적으로는 ‘동물’과 ‘인간’을 분리할 수가 없지만 글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두 단어를 분리해서 사용합니다.)
최근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낙마 촬영 현장에서 배우와 함께 호흡을 맞춘 말 한 마리가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참여 인원 7만명을 모을 정도로 당시의 큰 화제였는데, 만약 이것이 촬영 중 불가피하게 벌어진 부상 사건이라든가 세심한 배려가 부족한 수준의 부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국민청원이 올라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논란의 핵심은 말의 부상이 사람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배우를 태운 말이 전속력으로 달릴 때 말의 다리에 묶인 줄을 잡아당기는 방식으로 낙마 장면을 연출한 것인데, 처음엔 다들 CG였을 것이라 추측했지만 이것이 실제 촬영 현장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점차 논란이 일게 되었다.
여러 SNS에서도 이러한 소식이 일파만파 퍼지자 KBS는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고 촬영에 함께한 말은 안타깝게도 일주일 뒤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다른 방식의 촬영 방법을 고안하고, 동물 안전보장 방법을 강구하겠다’라고 밝혔다.
해당 사건을 접한 많은 누리꾼들은 '명백한 동물 학대 사건이다', '시대를 역행하는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것이 참혹할 따름이다', ‘말 못하는 동물에게 이런 짓을 한다는 건 살인과 다를 바 없다’라는 의견을 내놓으며 해당 사건을 방관한 KBS를 규탄하고 있다.
말의 낙마 장면을 찍은 드라마는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1996년 방영된 KBS 드라마 ‘용의 눈물’, 2014년 방영된 KBS 드라마 ‘정도전’이 ‘태종 이방원’과 똑같은 낙마 장면을 촬영했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더 안전한 방법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용의 눈물’과 ‘정도전’을 찍은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촬영 방법은 오히려 더 퇴보한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번 사건처럼 과거였다면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을 동물 관련 사안들이 큰 화젯거리가 되는 시대가 왔다는 점이다. 우리가 먹는 고기는 어디서 오는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자유를 억압당하는 동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화장품, 의약품, 패션을 위해 희생당하는 동물들을 구제하는 방법은 없을까? 같은 질문들이 여기저기서 솟아나는 것은 우리의 의식 수준이 과거보다 높아졌다는 방증이다. 또 비건 식단이 공유되고 비건 패션이 떠오르며 동물 실험에 관한 논의가 많아지는 것은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하나의 증명 과정이기도 할 테다. 동물과 인간이 조화롭게 사는 세상이 머지않아 도래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까? 무엇부터 시작하면 될까?
난 극단적 인간우월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극단적 인간우월주의'와 '인간우월주의'는 조금 다르다는 것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인간우월주의란 말 그대로 인간이 다른 종들보다 우월하다, 라고 여기는 사상이다. 이러한 인간우월주의는 의식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굶주린 것처럼 보이는 길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행위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길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줄 때, 우린 의도치 않았겠지만 길고양이의 자립심을 침해하고 만다. 스스로 먹이를 찾을 능력이 되는 길고양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는 것의 이면에는 ‘내가 너보다 우월하니까 베풀어줄게’라는 무의식이 깃들어있다. 짧은 찰나지만, 먹이를 주는 순간 사람과 길고양이 사이에는 상하관계, 또는 우월 관계가 형성된다. (불쌍하다, 도움을 줘야겠다, 라는 마음 자체가 우월의식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지닌 강력한 연대의 힘, 선의지의 기원이기도 하다.)
조금 더 쉬운 이해를 위해 응급구조의 원칙 중 하나를 살펴보자. 누군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의식이 있는 상태라면 내가 도와주기를 원하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즉,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해 의식이 있다면 위급한 상태에 처한 사람의 의도가 우선이라는 거다. 위험에 처한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 도움을 주려고 하는 행위는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적용해본다면, 원칙적으로 따질 때 인간 우월주의가 적용되지 않은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언어적 소통이 전제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굶주려 보이는 길고양이에게 “내가 너에게 먹이를 줘도 될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때 (비슷한 예로 길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오려고 할 때 “내가 너를 입양해도 될까?”라는 제안을 할 수 있을 때) 길고양이와 우리는 인간 우월주의에서 해방된 동일한 관계 선상에 서게 되는 것이다. 길고양이의 의도가 배제된 상태에서 우리의 기준으로 길고양이를 판단하는 것은 결국 길고양이를 낮게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모두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행위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우리가 냥어(고양이들의 언어)를 배우고 학습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건 지금으로써는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도 언어의 문제로 인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심지어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도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동물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사람끼리의 소통보다 원활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우린 무의식중으로 인간우월주의를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우월주의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과 비슷한 느낌의 단어라고 볼 수 있다. 본 성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딱히 부정할 필요가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하나의 천성이다. 본성은 인간의 삶에서 이성만큼이나 중요한 천성이다. 본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본성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것이 너무 치우치지 않게끔만 관리하면 된다. 본성이 위험할 때는, 그것이 잘못 이용하기 시작할 때, 혹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할 때이다.
인간우월주의도 마찬가지다. 인간우월주의는 본성과 비슷해서 그 자체를 부정하면 인간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즉, 인간우월주의를 부정한다는 것은, 인간이 동물을 귀여워하는 행위, 배고파 보일 때 먹이를 주는 행위, 동물들이 살 집을 마련해 주는 행위, 동물을 아끼고 위해주는 행위 모두를 부정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인간우월주의를 부정하면 모든 생명이 평등해질 수는 있다. 다만, 그런 세상은 그 어떤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우월주의 자체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될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동물들을 내 마음대로 이용해도 된다고 믿는 마음을 조심스레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이 동물은 내가 이렇 게까지 해도 아무런 표현을 할 수 없을 테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야지, 하는 생각에서부터 동물권 침해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동물권 논란은 '소통이 되지 않은 존재를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하는 문제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동물권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한다. 동물권 논란은 결국 인간끼리의 문제와도 연관이 되니 말이다.
(다음 편에 계속)
<비글미소의 블로그> '인간우월주의'가 사람의 눈을 멀게 합니다
About Writer : zxv12360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