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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May 10. 2019

파스칼! 칼슘! 슘바꼭질! 우겨도 괜찮아요.

게임은 계속돼야 하니까요.




끝말잇기를 한다.

전자파 - 파스칼 - 칼슘 - 슘바꼭질

"그런 게 어딨어?" "있어!" "없어!" "있어!!" "아, 알았어. 그냥 다시 해"

감자 - 자양분 - 분뇨 - 뇨숙자

"그런 게 어딨어?" "있어!" "없어!" "그럼 뇨자!" "아씨 너랑 안 놀아!"


| 우기는 삶에서 합리적인 삶으로


 한 번쯤은 겪었을 끝말잇기의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래. 우기는 건 나쁘다. 없는 사실을 꾸미고 우기는 건 좋지 않음이 분명하다. 정정당당해야 할 게임에서 없는 단어를 만들다니. 같이 놀지 못하는 천벌이 내려짐이 마땅하다. 어릴 적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거나, 고집 센 친구와의 놀이가 쉽게 파투 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부족한 지식과 경험에, 우기는 게 다반사였던 시절이니 오죽했겠나.


 성인이 되면서 주장이나 견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졌지만 다른 시각을 가진 상대방에겐 여전히 어릴 적 끝말잇기의 우김과 같은 느낌일 때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뒷받침되는 근거나 사실을 제시하면 수긍하는 정도로 성숙하긴 했지만 여전히 빈약한 지식과 경험으로 우기면서 살고 있다. 나름 합리적이었던 주장이 꺾이고 우김으로 드러나는 순간, 왜 그런지 모를 한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우기는 게 익숙하면서도 또 잘 못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싫어할까 봐, 고집스러워 보일까 봐, 나중에 부끄러워질까 봐. 눈치 보느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거다. 우기는 게 나쁜 거라면 눈치 보느라 안 하는 게 낫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다른 사람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스스로의 결정과 마음가짐에도 적용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우겨볼 만도 한데 그걸 잘 못한다. 가령 인생의 목표라든지, 뭔가를 해보려는 의지의 차원에서 말이다. 그저 쪼끔 쌓인 경험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가 적잖이 삶을 심심하게 만들고 있는 거다.


 퇴사하려는 사람에게 경제적인 위험에 대해 설파하고 음악이 더 좋은 아이에게 학교 성적의 중요성과 미래에 기다리고 있는 경쟁시대의 치열함을 강조하며 의지를 꺾고 틀에 가둬버리려 한다. 아주 현실적이다. 객관적으로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설득력에 압도된 합리적인 결정으로 수년을 더 보내고 수십 년을 더 지나면? 후회와 아쉬움을 얻게 된다. 그 무섭다는 해보지 않은 아쉬움이다.


| 스스로에겐 우겨도 괜찮아


 적어도 자신은 우겨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되고 싶다 보다는 된다가 낫다는 거다. 어차피 누구도 알 수 없는데 무슨 상관인가. 그냥 된다고 보는 거다. 아니. 뭐라도 쓰고 있다면 그냥 작가라고 하는 게 더 낫겠다. 이건 마치 칼슘에 슘바꼭질로 응수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도 뭔가 억지스러운 면을 느끼고 있지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우기는, 쉽게 포기하진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인 거다. 딱 보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배운 적도 없고, 특출 난 것도 아니고, 쌓아 둔 특별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다시 말해, "객관적으론" 불가능해 보인다는 거다. 당연하다. 그동안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 주변에선 자꾸 말린다. 안된다고, 쉽지 않다고, 늦었다고, 시간 낭비 말라고. 동의한다. 아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하고 싶다. 어쩌겠나. 알면서도 하고 싶은데. 그래서 우겨보는 거다. 난 재능이 있다고, 하다못해 하다 보면 재능이 생긴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라도 우기고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슘바꼭질로 우겨보는 거다. 스스로는 그럴싸하다고 믿으면서.


 시간이 지나도 별거 없을 순 있다. 그런데 슘바꼭질을 우길 정도로 스스로에게 우겼다면 분명 조금은 달라져있을 거다. 의지박약인 내가 걸작이 될 거라고 우기면서 수년 째 글을 써오고 있는 것만 봐도 나름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아. 예가 너무 약한 것 같아, 중국의 80세 모델 왕데순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 듯하다. 24세 때 꾸던 극단의 꿈을 57세에 이루고 80세가 다 되어서야 빛을 발한 의지의 할아버지다.


지금을 위해 60년을 준비했어요.


 끝. 디 엔드. 이 말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순간을 의구심과 초조함에 전전긍긍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객관적이었다면 진작에 포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 70세에 다시 몸만들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79세의 나이에 런웨이에 오른 그를 가장 섹시한 할아버지라 부르는 건, 80세에도 탄탄한 몸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독여 그곳까지 이끌어 온 탄탄한 의지의 섹시함이 아닐까. 당신도 할 수 있다는 할아버지의 우김이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 슘바꼭질. 사전에선 찾지 마오.


 노력하면 언젠가는 빛을 발한다는 희망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기를 정하고 결과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결과는 둘째 문제다. 결과까지 보면 우기는 게 힘들어지니까. 그래서 슘바꼭질로 우길 땐 절대 사전을 찾아보면 안 되는 거다. 그러면 스스로 무너진다. 그냥 그게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래야 우길 수 있다. 절대 객관적이 되면 안 된다. 당장의 상황과 결과를 보면 결코 우길 수가 없으니까. 지난 경험이 말해주고 있다. 수 없이 해봤는데 금방 우울해지고 별로였다.


 슘바꼭질은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의 간절함이고 시도다. 참을 수 없어 손이 가고야 마는 마음의 근질거림. "긁으면 더 가려워. 참으면 괜찮아져!" 사람들이 말한다. 자꾸 긁으면 상처 난다고. 더 긁으면 덧난다고 진심을 담아 걱정스럽게. 맞는 말이다. 글이 쓰고 싶어 쓰다 보니, 더 쓰고 싶고 더 잘 쓰고 싶고 그렇긴 하다. 잘 되지 않는데 하려니 답답하고 잠깐의 시원함이 더 큰 근질거림으로 돌아오기도 하더라. 그 답답함에 팽개쳐두면 나름 또 참을만해지기도 하고.

 그런데 그 잠깐의 시원함을 포기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나는 이게 꼭 때인 것만 같다. 아직 덜 벗겨내서 가려운 때. 그래서 때수건에 비누를 살짝 묻혀 문질러 보는 거다. 벗겨지면 시원해지지 않을까 싶어.


 세상엔 베스트셀러 작가로 태어난 사람도 수완 좋은 사업가로 태어난 사람도 없다. 마음의 근질거림을 해소하려 뭐라도 하다 보니 뭐라도 된 걸 테다. 그러니 적어도 그런 근질거림을 참지 못하고 뭐라도 하고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조금씩 되어가고 있다고도 우겨 볼 수 있지 않을까? 가끔, 우김의 기술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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