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햔햔 Sep 17. 2019

프로 삶러가 되기 위해...

일관성과 유연함의 경계에서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서울에서부터 2시간을 내리 운전하면서 출출하여 먹었던 과자. 조금 느끼했나?

때마침 출발하고 바로 곯아떨어졌던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 둘 깨기 시작한다.

잘 됐다고 생각한 나는 휴게소로 향했고 아이들을 화장실로 몰다 끝내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외치고 만다.


"라면 먹고 싶어!"

뜬금없는 고백에 아내가 주저하다 부끄러운 듯이 대답한다.


"나도"

아. 이런 천생연분 같으니.. 맞다. 아내도 같이 먹었다. 역시, 느끼한 속을 달래는 데는 라면만 한 게 없나 보다. 그리고 여기 라면. 맛있다.


| 프로의 발견


서울을 오가며 한 번씩 들리는 중간 지점의 휴게소다. 하행선이라 주말이면 사람이 별로 없어 여유롭게 자리를 잡을 수 있고 음식이 빨리 나와 종종 찾는 곳이다. 음식 받는 곳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곧 주문한 음식이 나온다. 손과 입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도색이 벗겨진 양은 냄비에 다른 어떤 것도 넣지 않고 끊여 나온 라면. 호로록호로록. 맛있다. +.+


맛있게 먹고 있으니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익숙한 질문이 들어온다. 셋째와 넷째를 같이 앉혀두면 항상 듣는 질문. "쌍둥이여요?" 라면을 주셨던, 인상 좋으신 할머님의 질문을 시작으로 가벼운 대화가 오간다. 사람이 많지 않았던 때 와서 그런지 우리를 기억하시곤 어디서 본 것 같았다며 굉장히 반가워하신다. 그러다 주문이 들어왔는지 다시 분주하게 음식을 만드신다. 나는 다시 맛나게 라면을 먹는다.


78번 손님. 라면 나왔습니다.


지하철에서나 들을 법한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사무적인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와 목소리 좋다'하고 생각들 때쯤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봤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아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완벽한 표준어(구사할 준 몰라도 구분할 준 아는)를 구사하며 방송한 분은, 아까 대화를 나누던 할머님이셨다. 완벽한 충청도 사투리로 대화를 나누던 할머님의 완벽한 서울말. 뭐여?


와. 완전 속았다. 대화를 해본 사람이라면 저 안내 방송을 듣고 할머님이라고 생각하긴 힘들 거다. 정말 다년간의 경험이 맺은 멘트는 라면 맛과 같이 완벽했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여유롭게 대화하다가도 주문이 들어오면 라면 하나를 맛나게 뚝딱 만들고, 사무적이면서도 딱딱하지 않은 방송 멘트를 완벽한 표준어로 구사하는 할머님. 필요할 때 필요한 모습일 수 있는 변화무쌍함. 프로. 그래. 이런 모습이 프로의 모습이다.


| 아마추어의 프로에 대한 환상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존댓말에 "요"를 붙이지 못했다. 머리로는 되는 서울말이 목에 탁 걸려 나오지 않은 것도 있지만 경상도 사나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겠다는,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 보니 내뱉는 말들은 자연스레 반말 비슷한 말이 되었고 많은 선배들로부터 버릇없는 후배님으로 찍혔다. 그렇다고 대놓고 사투리를 쓴 것도 아니다. 단어와 표현은 표준어를 표방하면서 억양은 어쩔 수 없이 경상도 틱한 '요'가 생략된 말투. 뭐. 정리하자면 말 끝이 흐려지는 이상한 말투였다. 미팅 자리에서 내가 어디 지역 사람인지 맞추는 게임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경상도 사나이의 거침을 잊지 않으려 자잘한 부딪힘과 시비를 피하지도 않았다. 그 덕에 덕 본 것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적어도 "갱상도 싸나이"의 자존심은 지켰다고 자평했더랬다. 천만다행스럽게도 그런 치기는 군 생활 2년을 통해 많이 다듬어졌지만, 살짝 빗나간 일관성에 대한 환상은 내 삶의 여기저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관성. 이것이야 말로 프로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고, 그게 잘하는 거라고, 그래야만 바른 사람이라고 믿었다. 일관성을 운운하며 고집을 부리거나 굽히길 거부하고, 그러면서도 때때로 달라지는 나의 모습에 부끄러워 자책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 프로만이 프로를 알아본다.


나의 아마추어스러움은 직장 후배에 대한 기나긴 오해로 여실히 드러난다. 늦게 도착한, 환영 술자리가 열린 가게 앞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해 통화하는 후배를 보게 된 게 화근이었다. 친구에게 라면 으레 할 수 있는 거만한 말투와, 30년을 살았으면 자연스레 나올 수 있는 아저씨 자세를 나는 좋게 보지 않았다. 대할 때면 항상 조심했고 보이지 않는 확실한 선을 그었다. 그렇게 '나는 알고 있다'는 믿음으로 '어디 보자'라는 마음으로 편협한 시선을 2년간 거두지 않았다. 무려 2년간이나!! 언젠간 본모습을 보일 거라고. 그때의 모습을 우리에게도 보일 거라고 경계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3년간 똑같은 거다. 저 쓸데없이 똑바른 친구가.


그 친구는 그냥 진짜 프로였다. 선배에게, 후배에게, 친구에게 일관성 있는 대인관계의 프로. 그저 나의 편협한 믿음이 진짜를 보지 못할 정도로 짙고 탁했던 것을 괜한 사람 잃을 뻔한 거다. 상황에 따라 말투나 행동이 달라질 수 있음에도 사람이 믿을만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했고, 정치적이고 순수하지 않다 넘겨짚었다. 참. 지금 생각해도 낯 뜨거워지는 장면들다.


| 프로 삶러가 되기 위해..


굳이 프로의 영역을 운운하지 않아도 한 인간의 다양한 모습은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유시민 작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적당히 비굴해져 살아남을 수 있음을 고백했고 법륜 스님도 갖은 고문에 거짓 자백을 한 바 있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그 두 사람이 호기롭지 못하고 구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그런 비굴함의 용기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분들임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뿐이다.


한 순간 비굴해진다고 해서 비굴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거다. 그냥 그 순간 비굴한 거지. 비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그랬던 거다. 무슨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조금 비굴해지면 어떤가? 굳이 한 마디를 더 보태어 서로 간에 생채기를 내거나 주먹다툼을 해본들 남는 것은 심신의 상처와 소송일 테다. 오래된 친구와의 허물없는 자세와 대화는 그들만의 표현법일 뿐이다.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에게 내보일 모습은 아리라는 얘기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 맞는, 그 환경의 범주에서만 정도를 지나치지 않는 일관성을 유지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런 복잡하고 다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나. 그동안 삶이 생각보다 더 피곤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모습을 용인하진 못하지만 별 수 없이 그런 모습일 수밖에 없었던 모순적인 삶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인 듯하다.


어째서 이리저리 붙어 다니는 박쥐만을 연상한 것일까.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면서도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들꽃의 모습도 그러하고 여름의 저 싱그러운 잎을 모두 거두어 한 겨울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 굳건한 나무도 그러한데 말이다.

 

살아남으려 노력하는...


회사에서 아이와 살갑게 통화하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음에 해방감을 느낀다. 팀장과의 다소 억지스러운 미소를 띤 대화에 많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친구의 우김에 한발 물러서며 승패를 생각하지 않고 2살 난 아이에게 삐지는 내가 예전만큼 부끄럽지도 않다. 그 모든 것이 나이고 또 나니까. 느끼한 과자를 먹다가 얼큰한 라면을 찾는 변덕스러운 입맛을 가졌지만 먹는 것만은 행복해하는 딱 그 정도의 일관성을 가진 어른이면 됐다 싶다.

이전 14화 청소기도 청소를 해줘야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