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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Jun 12. 2019

풍성한 나무를 그리는 한 가지 방법

삶이 한 그루의 나무를 그리는 거라면...




어릴 적, 볼펜이나 연필로만 그리는 소묘를 좋아했다.

연필, 물감, 붓, 파렛트에 물통, 거기다 물까지 갈아줘야 하는 번잡스러움이 없고 그냥 손과 고개만 좌우, 위아래로 움직이는 심플함이 마음에 들어서다. 이때가 중학교 1학년이니까, 그때부터 어지간히 번잡스러운 걸 싫어했나 보다.


하루는 미술 시간에 도화지와 볼펜 한 자루를 들고 야외로 향했다. 당시 학교엔 꽤나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이를 그리는 게 수업의 내용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그늘 자리 하나를 잡고 부지런히 고개와 손을 움직인다. 분명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등나무 아래에서 그림을 그렸던 기억인데 나무는 잎이 없고 가지만 폭발하듯 사방으로 촉수를 내뿜고 있었다. 중심을 잡고 몸통을 그리니 가지가 뻗어나간다. 뻗어 나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지는 가지가 여백을 메꿔나간다.


한참을 잔 가지로 공백을 채워나가는데 이리저리 거니시던 선생님이 한 마디 툭 던지셨다.


"잔 가지를 그려봐"


"......................... 네"


의아했다. 열심히 그리고 있는 것은 잔가지였으니까. '더 많이 그리라는 말씀인가?'싶어 더 속도를 냈다. 쉽지 않았다. 점점 얇아지는 가지를 표현하려고 하니 어느 순간 더는 얇아질 수 없었다.

잠시 후, 끙끙대고 있는 나를 지나치던 선생님이 펜을 가로채 내가 그린 가지에 수십 개의 가지를 채워넣었다.


그냥 선으로!! 두둥.


나는 아연실색했다. 선생님이 내 그림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어쩜 이리 대충 그릴 수 있는지. 선생님이면서... 선생님이면서... 선생님이면서... (악~ 하며 무릎꿇고 부들부들하진 않았다..)


그런데 당황감을 수습하며 다시 들여다본 도화지엔 한쪽만 가지가 풍성한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아. '선생님이면서'가 아니라 '선생님이라서'가  맞겠구나 싶었다. 한 뼘만 떨어져 봤는데도 대충 그은 선은 풍성한 가지가 되어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바라본 나무는 굵기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많은 가지가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선생님이 얘기했던 잔 가지는 그 풍성함을 표현할 수많은 선이었던 거다.


도화지에 한 그루의 나무를 그리는 삶


삶을 도화지에 한 그루의 나무를 그리는 거라고 하면, 나는 여전히 잔가지에 치중해 있는 게 분명하다. 잔가지 하나를 그리는데 지쳐 뒤로 몸을 기댔던 어느 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생기 없어 보이는 앙상한 나무였으니까. 한 뼘 물러서니 그리 열중했던 잔가지의 디테일은 온데간데없고 애처로운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시도하지 않았고 작은 감정의 동요에 관계를 그르쳤으며 작은 일에도 일희일비하며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집착했던 수많은 날이 있었다. 세상 둘도 없이 중요해 보이던 것도 한 발만 물러서면 별게 아닐 수 있음에도 그 한발 물러서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나 보다. 단순한 것을 선호하면서도 삶의 태도에 있어선 단순해지려는 노력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따지고 집착하고 주저하고, 그러다 보니 여유는 어느새 내 옆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고 없었다. 단순한 걸 좋아했던 건, 그로 인한 여유로움과 평온함이 좋아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건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게으름과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랜만에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본다. 여전히 크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가지를 사방으로 뿜어내는, 잎까지 풍성한 나무가 보인다. 그래. 저 풍성함을 그리고 싶었는데 잘 보이지도 않는 잔 가지에 연연하며 도화지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던 거다. 뭘 그리려고 했는지도 까맣게 잊고.


이제 단순하지만 정성 가득한 선들로 도화지를 채우고 싶다. 지나친 말다툼과 감정싸움 그리고 주저하다 결국 후회만 남기는 많은 생각과 말보다,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그렇게 내 삶을 채우고 싶다.


사소해 보이는 선들이지만 한 발 물러서 봤을 때, 더는 쓸쓸해 보이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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