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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Oct 24. 2019

삼가 감사의 메일을 지우지 않습니다.


메일함을 새로 고침 하자, 누군가의 아픔이 올라왔다.
참으로 이기적 이게도 나는, 가끔 그들의 아픔을 맛본다.






 메일함 정리의 가장 적절한 시기는 할 일이 쌓였을 때다. 그리고 보다 최적의 시기는 그 쌓인 일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기 싫을 때다. 그래서 오늘도(?) 메일함을 정리한다. 선각자들의 깨달음을 실천하는 이 순간. 나는 채우기 위해 비워낸다.


삭제하시겠습니까?


 클릭. 클릭.

 제목만 봐도 불필요한 메일이 상당수다. 하나, 둘, 셋. 하나씩 줄어드는 메일의 수만큼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다. 역시 메일함 정리는 당장 덜어 낼 수 없는 일과는 달리, '만만함'이 있다. 시험 전날에만 책상 정리를 하던 버릇이 남은 영향이겠지만 이게 나름 도움이 된다. 간단하지만 하나의 일을 완수했다는 느낌이 그런대로 괜찮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완수를 그날의 마지막 완수로 마무리하냐 마냐 하는 고비가 남지만..


 하나 둘 정리를 하다 뭉탱이로 지우기 시작한다. 시간을 끌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쌓인 일이 생각에 밟혀 키워드로 색출해서 제거한다. 남은 메일 용량 50%. 거의 100%에 육박하던 메일을 반이나 덜어 냈다. 별 중요치도 않은 걸 많이도 담고 있었다.


삼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하여 메일함을 새로 고침 하자, 누군가의 아픔이 올라왔다. 당사자에겐 어제의 일 같을, 깊은 슬픔을 위로했던 이들에게 보낸 감사의 이메일. 새로 고침 한 화면의 첫 페이지에 올라온 메일을 보며 옛 기억이 담긴 물건을 마주한 듯, 한 동안 멍하니 바라본다.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사회의 변이 넓어진 탓에 다채로운 경조사에 참여했다. 결혼식. 돌잔치. 장례식. 그저 일상적인 이벤트였다. 때가 되면 가고 때가 되면 오는 그런 당연한 일로, 새삼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함께 조금 즐거웠고, 조금 슬펐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선가 예상치 못한 부고들이 찾아들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이들의 어찌 슬퍼해야 할지도 모를 소식들이 대뜸 들이닥친 거다. 몹시 당황스러웠고 혼란스러웠으며 현실감이 없었던 탓에 생각은 마비됐다. 멈춰있던 머리를 억지로 굴려 감각을 살렸을 땐, 눈물이 온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아직은 떠나선 안될 이들을 떠나보낸 슬픔을 상상해본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려는 시도 때문인지 한쪽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충혈됐다. 그렇게 누군가의 오열에 함께 흐느끼고 겉으로만 담담해진 그들의 감사 메일에 눈물짓게 된 후로, 감사 메일을 지우지 않게 됐다. 남일 같지 않아 슬펐고 내일이 아님에 안도했으므로.

 

 내가 보낸 작은 위로로 돌려받은 그 커다란 위안을 나는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참으로 이기적 이게도 나는 가끔 그들의 아픔을 맛본다. 결코 겪고 싶지 않은 그 아픔을 수천 억분의 일의 강도보다 미약하게 맛보며 위안을 받는다. 그 커다란 슬픔의 모름과 상상할 수 없이 클 슬픔의 자리를 미소로 채우고 있는 이들이 있음에 감사하며 생각한다.


넘치도록 행복하구나


  이따금 그들의 슬픔이 찾아와 나를 따스이 쓰다듬는다. 그들의 고맙다는 말이 더 고맙고 괜찮다는 표면적인 글이 나를 진심으로 괜찮아지게 만든다. 그리곤 일상을 살아가는 나를 배려하듯, 영원할 그 슬픔은 또 저만치 물러난.


 메일함을 비워내다 마음이 채워져 버렸다. 아. 오늘도 고민거리는 일 따위구나. 오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있구나. 오늘도 꽤나 행복하구나. 

 그렇게 그들의 슬픔을 버팀목 삼아 내 삶의 중심을 다시 더듬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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