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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Mar 30. 2020

19년간 하지 못한 스카이 다이빙

 스무 살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카이 다이빙. TV에서 본 그 순간부터 인생의 MUST DO 항목이었다.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향할 때의 떨림과 뛰어내리기 직전 마음속 밀당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파아란 하늘을 새처럼 날다 활짝 펴진 낙하산에 매달려 지상에 부드럽게 착륙하는 멋진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세상 가장 위험해 보였던 경험으로 용기의 훈장을 달고 싶었다.



| 하고픈 걸 못했던 이유와 핑계들


 그 시절, 여유가 없었다. 국내에서 할 수 있는 곳도 마땅찮았지만 넘치는 시간과는 다르게 항상 부족했던,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타지에서의 생활은 궁핍했고 언제나 "나중에 꼭!"이라는 다짐으로 "마음을 꾹!" 눌렸다.


 어처구니없었지만, 취업을 하고 나서도 신기하게 잔고는 불어나지 않았다. 때만 되면 평생의 친구 대출이가 밀린 돈을 받으러 왔다. 학자금 대출, 전세자금 대출. 아무래도 같은 녀석인 것 같은데 마이너스 통장이라는 가면을 쓰고 찾아오기도 했다. 재테크는 실패했고 생각보다 이른 결혼과 출산에 돈과 함께 시간이 사라지는 마법까지 경험하게 됐다. 우유 먹이고 기저귀 갈고 안아 재우고 우유 먹이고 기저귀 갈고 안아 재우기만 한 것 같은데 3년이 지나 있었다. 정말이다. 이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첩을 열지 않으면 인생에서 갓난쟁이의 육아에 쓴 시간이 순삭 된 느낌이다. 힘들었던 기억도 중첩되어 딱 세가지만 기억난다. 먹이고 갈고 재운. 


 그렇게 생기는 것들이 늘수록 없어지는 것들도 늘어갔다. 생각보다 빨랐던 결혼은 2세 계획과 함께 나를 전력 질주하게 만들었고 '해야만 하는 것들'로 인해 모든 '하고 싶은 것들'은 사치가 됐다.


| 절호의 기회


 순삭의 시간을 보내던 중 미국으로 두 번째 파견을 나갔다. 회사의 실수가 의심되지만 개인적으론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다. 놀랐다. 지난 파견 때의 다사다난이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큰 어려움 없이 순탄한 시간을 보냈다. 한 번 겪어 봤다고 집 계약부터 모든 생활의 경로를 꿰뚫고 있는 내게 감탄했다. 경험의 힘을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그 마음의 여유 때문이었을까? 어렴풋이 갖고 있던 스카이 다이빙의 설렘이 불현듯 찾아왔다.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던 중 눈에 띈 스카이다이빙 체험 할인 쿠폰이 내 심장을 심하게 두드렸다.


 하지만 찾아왔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쉽게 문을 열어 줄 수는 없었다. 6하 원칙에 따른 조사가 필요했다.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등등. 그간 갖다 붙였던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꺼내 철저히 탐문했다. 그리고 문을 빼꼼 열었다. 이제 때가 된 거다.


 물론 혼자 할 수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삶은 여전히 팍팍했고 내게는 토끼 같은 자식 둘과 곰 같은 아내가 있었다. 적지 않은 비용과 딸린 식구라는 제약이 있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곰같이 넓은 맘을 가진 아내의 허락이 떨어졌다. 거기엔 소셜커머스 할인 쿠폰의 힘이 지대했으리라 본다. 7~80만 원가량의 체험비를 4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고, 아내에게 귀띔했고, 허락이 떨어지자 머뭇거리다 쿠폰을 질렀다. TV에서 보았던 휴양지의 모습은 아닐 테지만, 광활한 평야를 자랑하는 텍사스의 하늘을 날 수 있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 드디어 하는 것인가.


| 역시 대부분의 일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설렘도 잠시. 번거로운 과정이 문제가 됐다. 전화를 해서 일정을 잡고 2시간 거리의 비행장으로 가야 했다. 당일 비행 여건이 우호적이지 않으면 비행은 취소되고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매 주말마다 비행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근태 처리는 한국에서 했으므로 평일 당일에 연차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날씨가 화창한 날마저도 강한 바람으로 비행이 취소되기 일쑤였다. 아. 극한의 감동을 위한 시련인가.


 예약한 날 천둥을 동반한 비가 내렸고 목적지를 30분을 두고 바람 때문에 비행허가가 나지 않는다며 취소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출발하라는 전화에 드디어 도착한 비행장에서, 장장 두 시간 반을 대기하다 돌아 나오기까지 했다. 그렇게 여러 차례의 시도와 방문 끝에 출국일이 다가왔고, 결국 스카이다이빙 옷도 한번 입어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유효기간이 남아있는 쿠폰과 함께..


 역시 모든 일은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더라.


| 실망보다 뿌듯함이 더 컸던 실패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곳에서의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실망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뿌듯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의지와는 무관한 것들을 빼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는데 뭔가 뿌듯함을 느꼈던 거다. 그래서 나는 이걸 했다고 본다.


 이제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설렘보다 두려움이 커졌음을. 처음에 하고 싶었던 것은 멋진 경험이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설렘이었는데 솔직히 갈수록 두려웠다. 이제 직장도 다니는데, 이제 결혼도 했는데, 이제 아이도 있는데.. 합리화시킬 수 있는 이런저런 핑계가 조금은 고맙기도 했다. 그리고 아내가 완강히 거부하길 원한 바도 없진 않았다.

 그런 핑계들이 조금은 민망하고 식상했던 것인지 일을 저질렀고 하는데 까지 해봤다. 그래서 만족한다.


 스카이 다이빙장을 찾았던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동안 찾아본 리뷰들에 기대하고 걱정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내일 비행이 가능하냐는 문의 전화를 미루고 미루다 하게 된 그날 오전. 스카이 다이빙장을 향해 출발한 이른 아침, 외딴 지역의 아주 허름한 비행장에 도착한 그 순간. 익숙하지 않았던 흙냄새에 코를 벌름거렸던 순간. 모든 사고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내가 죽거나 크게 다쳐도 절대 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 나는 스카이 다이빙을 경험했다. 딱 한 걸음이었지만 쏟아져 내리는 두려움에 맞서 올라섰다.


 그날. 바람이 잦아들지 않아 2시간 반의 대기 끝에 끝내 비행은 취소됐지만 내 맘은 수십 차례 공중에서 뛰어내렸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낡은 비행기를 바라보며 오만 오천 오백 오십 다섯 가지 생각은 거뜬히 했다. 점검을 위해 펼쳐진 낙하산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중간중간 상황을 알려주는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의 발소리를 들으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끝내 포기하지 않고 그 모든 날 선 감각을 오롯이 감당했던 거다.


 바람 때문에 비행이 취소되어 오늘은 불가능하겠다는 얘기에 돌아 나오는데,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기분을 경험했다. 그래.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오랜 기다림과 먼 거리를 달려온 가상함에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에도 다행이라는 느낌도 그 크기만큼 들었다.


| 그간의 시간과 노력을 위한 위로


 가끔 열심이었던 내 마음과는 무관하게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글 쓰는 것이 그렇고 그림 그리는 것이 그렇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그렇다. 회사에서 내 맘 같은 프로젝트와 사람이 없고 쓰고 그리는 이 일이 하루 걸러 하루는 힘들어지는 날의 반복이다. 그럴 때 나는 그때의 두려움과 쿠폰에 떠밀린 용기를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럴 수 있었던 나 자신을 칭찬한다. 난 그때 40만 원짜리 용기를 샀다. 그리고 그 쿠폰의 유효기간만큼 두려움과 이겨냄을 훈련했다. 이제는 기간이 지나버린 쿠폰은 그 수명을 다했지만 그 값진 기억은 박제되어 유효기간이 없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학업과 취업과 육아와 직장생활에서 대동소이한 상황들을 겪는다. 그렇다고 믿는다. 그럴 때, 지난 노력에 대한 아까움과 노여움보다는 그때의 찬란했던 용기를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결과가 어찌 되었든 시작하고 고민하고 하는데 까지 해보고 있다면, 됐다. 아마도 일의 과정을, 결과를 수 천 번은 더 상상했을 테니까.


 우리들의 수고를 한낱 결과로 단정 짓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설렘과 가슴 졸임이 우리를 살 찌우고 있다고 믿었으면 좋겠다. 부디 우리가 했던 수 많았던 수고로움의 넉넉함을 실망감이라는 극약처방으로 다이어트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매일 같이 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를 반복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움츠려 드는 몸을 최대한 펴고 어제보다는 멋지게 착륙하는 오늘을 만드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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