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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May 09. 2020

무척이나 허리 앞치마가 하고 싶었답니다.

시작이 그리 거창할 필요가 있나요. 뭐.

잠깐의 성취감 후,
긴 기간의 현실 자각 타임




| 한 없이 가벼웠던 계획들


진로 상담 시간에 담임은 집 근처 자동차 학과를 가면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다고 유혹했다. 20년을 살며 정든 이곳과 받을 '수도'있는 장학금. 흔들릴 '뻔' 했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던 나는 안정감과 돈보다 신선함과 꿈을 택했다. 그 결과, 돈의 부담은 집이 꿈의 허망함은 내가 짊어졌지만, 그 당시 내겐 큰 고민이 필요 없던 결정이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져야 한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이 했던가.


고맙게도 나를 공부시켰던 친구 녀석이 내 수능성적에 적당한 대학과 적당한 과를 적당한 비전과 함께 제시했고 나는 별 이견 없이 친구의 설계에 따랐다. 아무래도 이 친구와의 짧았던 문답이 진정한 진로 상담이 아니었나 싶다.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걸 해 보고 싶은지. 그런 가벼운 대화 속에서 희미한 미래를 그렸다고 할까.


| 인생 첫 구직


카페에서 허리 앞치마를 두르고 서빙하는 남자들이 그리도 멋져 보였다. 뭔가 시대 초월적이었고 섹시한 멋이 있었다. 덕분에 인생 첫 아르바이트 고민이 사라졌다. 이공계 출신답지 않게 계산적이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예상치 못한 곳으로 마음을 빼앗겼다.


신입생 6개월 차에 앞치마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놀만큼 놀았고 서울 사람과도 위화감 없는 대화가 가능해졌다고 판단한 무렵이었다. 위협적인 경상도 사투리가 무뎌지고 나름 시골 티를 벗어나 내추럴해졌다는 혼자만의 평가로 당당히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띠링.


이상했다. 카페들은 하나같이 남자 직원은 뽑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로 남자는 뽑지 않는 것인가 나란 남자를 뽑을 순 없는 것인가. 심증은 충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태생적 이유로 거절당했고 별 수 없이 유사 형태의 호프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 작은 세계에서도 선호하는 인재상이 있었다. 성별, 키, 얼굴, 말투. 대놓고 얘기하진 않지만 나를 마주하고 신상을 받아 적는 그들의 손놀림과 미세한 표정의 변화는 어느 정도 당락을 예상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사투리에 한 번 놀랐고 키에 한 번 갸웃했으며 몇 번을 거듭 말해 간신히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연락을 준다는 말이 잘 가라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몇 군데 가게를 돌았고 연락이 온 한 곳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물론 키를 보는 곳은 아니었고 당연히 말투를 보는 곳도 아니었다. 믿기지 않게도 얼굴을 보는 곳. 그곳에서 일하게 됐다.


| 드디어 앞치마를 두르다.


당시 나를 봤던 알바 누님이 내 프로필에 '얼굴. 나름 괜찮음'이라고 추가했다고 했다. 조금은 동의한다는 뉘앙스로 말해주는 매니저 누님은 내게서 점수를 많이 따갔고, 나는 그날로 그만둔 알바 누님의 자리를 따냈다. 사심이 많이 포함된 평가였음을 곧바로 알았지만 그래도 아주 잠시나마 행복했다.


어쨌든 내게, 그렇게 고대하던 앞치마가 내려졌다. 진한 남색의 허리 앞치마.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얻어낸 최초의 물건을 두르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멋졌다. 시대 초월적이었고 스스로 섹시하다고 쇠뇌 되게 만들었다.


일은 간단했다. 술을 나르고 음식을 나르고 테이블을 치웠다. 하지만 간단한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거운 호프와 안주를 나르고 순식간에 더러워지는 재떨이를 갈고 오랜 시간 서있는 일은 많은 체력을 요했다. 왜 하필 '아이 러브 스쿨'의 인기가 극에 달했을 때 시작한 것인가. 몰려드는 단체 손님에 사장님은 미소를 터뜨렸고 나는 탄식을 터뜨렸다. 


손님 응대는 어떤가. 본래 차가웠던 인상은 힘을 쓰며 구겨지기까지 했고 온화해졌다 여긴 말투는 날 선 사투리에 묻혀 손님들의 클레임이 가장 많은 종업원이 되었다. 술 취한 손님과 뭣 하러 그렇게 신경전을 벌였는지... 그럴 때마다 사장님의 미소는 사라졌고 나는 홀에서 사라져야 했다. 이쯤 되니 나를 감각적으로 거부한 카페에 경의가 표해진다.


| 최선은 아니었지만...


되짚어보면 여러모로 호프집 아르바이트는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다. 몸은 힘들었고 페이는 최저였으며 시간의 자유도 없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 하지 않을 아르바이트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를 떠올릴 때면 꽉 찬 느낌이 드는 이유는 앞치마를 두른 그날, 외로웠던 내 주위에 사람들이 둘러졌기 때문이다. 일하는 날이 아니어도 따뜻한 밥을 내어주셨던 주방 이모님, 퇴근할 때면 간식거리를 챙겨주었던 매니저 누님, 마음에 안 든다면서도 시급을 올려주던 사장님, 그리고 같이 일했던 형, 누나들은 항상 주변을 채워 주었고 홀로 지냈던 나의 서울 생활은 그만큼 덜 외로웠다. 충분히 힘들었지만 선망의 앞치마와 함께 사람도 얻었음에, 당시의 기억이 나쁠 수만은 없는 이유다.


그리고 그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기. 비록 어쭙잖고 대단치 않은 동기였지만 연고도 없는 곳으로 진학을 하고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면서, 하면 된다는 막연한 용기를 가졌다.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못할 게 뭐가 있겠냐며.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진 못해도 나름 의미 있으리라.


지금. 어떤 이유에서든 최선이 아닌 선택과 시도를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무언가 갈망하며 노력하고 있다면 당신의 시도는 비록 후회가 함께 하더라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어차피 인생은 마음 가는 대로 살며 의미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후회가 모이면 지혜가 된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선 후회를 쌓기 위한 시작이 필요하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마음이 있다면 시작하자. 내 어릴 적 서울과 앞치마라는 선망을 시작으로 꾸려온 삶을 돌아보면, 결국 남는 장사였다. 그게 후회라는 지혜든 만족이란 소중한 추억이든,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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