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즐거움의 힘
롤러장.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장소. 국민학교라는 단어와 함께 오랜 기간 잊힌 그곳을 어느새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과 함께 찾았다.
세상 천진한 나의 발걸음. 가벼운 아이들의 발걸음보다 마흔이 넘은 아빠의 발걸음이 더 가벼웠다. 아직도 롤러장이 있다는 아내의 말에 검색해 본 그곳이 지나치게 옛 기억을 자극했던 탓이다. 속칭 "날렸던 한때"를 떠오르게 했고, 기회만 엿보고 있던 내게 반차를 쓰게 함으로써 도통 오지 않는 기회를 만들게까지 했다.
화려함이 더해진 장소는 30년 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근두근. 그 옛날 친구들과 한껏 꾸미고 롤러장에 들어섰을 때의 설렘이 그대로 살아났다. 화려한 조명, 매끈한 바닥, 계산대 뒤로 줄지어 선 롤러 스케이트. 잊고 지냈던 오랜 기억 속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뿜뿜. 어서 달리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계산을 마치고 롤러 스케이트를 신는 순간, 한때 수없이 반복했던 손놀림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익숙함을 상징하듯 신발 끈은 발등의 끝에서 매듭이 지어졌고 그걸 본 사장님은 잘 타는 사람은 발목까지 안 매기도 한다며 내 익숙함을 알아봐 주었다. 몸으로 익힌 것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더니... 뜻하지 않게 어깨가 으쓱하며 솟아 올랐다.
아이들이 롤러 스케이트를 신는 것을 도와주며 '나도 모르게' 주절주절 옛 이야기를 읊었다. 아빠도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한 번 타보고 매일 오고 싶었다느니, 한창 때는 일주일에 3번씩 다니기도 했다느니, '나도 모르게' 들떠서 떠들어 댔다. 그리고 아이들 보호 장비를 챙기던 아내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던진 멘트에 '나도 모르게'가 정정됐다.
아빠가 제일 신났네~
그랬다. 나는 제법 과하게 '신나'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신남에 말이 많아지고 몸이 들썩였다. 그런 아빠의 모습에 아이들은 긴장된 표정을 짓느라 바쁜 와중에도 흐뭇한 미소를 간간이 보여줬다. 인자한 아이들이다.
솟아오르던 어깨와 신나 들뜬 마음 덕분인지 롤러 스케이트가 제법 묵직함에도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매끈한 바닥에 롤러 스케이트가 미끄러지는 순간, 옛 추억과 함께 수많은 감흥이 밀려들었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시간은 뒤로 흐르는 것만 같았다.
공간을 채운 요란한 음악에 심장은 비트를 맞추기 시작했고 덩달아 발놀림은 빨라졌다. 공간을 헤치며 느껴지는 바람 속에서 옛 기억 속 냄새도 느껴지는 듯했다. 그 흔한 표현으로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신나는 정도가 아니라 감동이었다. 쭉 살아 있었지만 심한 감정의 타격감에 살아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체험이 선사하는 기분 좋은 두드림이었다.
감동의 물결 속에서 부리나케 한 바퀴를 돌고는 엉거주춤 스케이트장으로 들어서는 아이들을 마주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건너가는 미소를 따라 손을 뻗어 작은 손을 잡았다. 옛 감상은 잠시 접어두고 아이들에게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만끽할 수 있는 추억을 심어 줄 시간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때가 막 오픈한 시간이라 아이들을 가르치기 수월했다. 게다가 고수일 것이 분명한 사장님의 특별 레슨이 있어 아이들은 금방 요령을 터득했다. 예상은 했지만 아이들의 습득 속도는 빨랐고 긴장한 표정에 조금씩 여유와 즐거움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아마 평생 가져갈 추억도 함께 쌓이고 있을 터였다.
30분 만에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게 된 아이들과 손을 잡고 롤러 스케이트장을 누볐다. 한 겨울의 스케이트장에서도 연출했던 장면이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마치 타임슬립으로 아이들과 과거로 날아온 것만 같았다. 국민학생으로 친구들 손을 잡고 타던 그때의 내가 되어 아이들과 진짜 친구가 된 느낌. 또 다른 감동이었다.
아쉽게도 몸이 좋지 않았던 아내는 함께 즐기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새 알아서 즐기는 아이들과 허세를 부리며 온갖 것을 보여주려 애쓰는 남편의 모습에 아내는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내게 닿는 아내의 눈빛이 아이들을 보며 기특해 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음에 묘한 보람을 느꼈다. 젊게 산다는 게 별건가. 아이처럼 천진난만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싶었다.
아이들은 엉덩방아를 찧고 눈물을 달고도 부지런히 롤러 스케이트를 탔다. 2시간을 꽉 채우고도 아쉬워하며 곧바로 다음을 기약하는 모습을 보니 충만한 즐거움에 보람까지 보태졌다.
롤러 스케이트라는 두레박으로 옛 추억을 퍼 올리며 설렘과 즐거움 그리고 보람을 함께 길어 올렸다. 다행히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나이에도 즐거움은 여전했고 세대를 넘어선 감흥이 있었다.
롤러 스케이트 2시간에 30년은 젊어진 느낌이다. 그리고 아이들과의 30년 격차가 무색해졌다. 함께 한 추억을 얘기할 때면 같이 즐긴 친구로서 대화가 이어졌다. 별것 아닌 영웅담에 호응해주고 지금으로선 당연한 실패담에 서로 격려하는 지극히 건설적인 시간이었다. 그리고 초롱거리는 눈망울로 다음을 기약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이런 것들을 행복이라 명명하는 데는 큰 고민이 필요 없었다.
시대가 지나도 즐거움은 변하지 않는다. 세대를 구분하곤 하지만 동일한 경험의 즐거움 앞에서 구분은 무의미하다. 의미를 찾아 헤매는 세상에서 의미 없음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지금, 그 무의미함을 위해 시간이 지나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마음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도 큰 욕심인 것을 알지만 행복 충만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 욕심만은 꼭 이뤄졌으면 하는 욕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