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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Apr 13. 2023

별로라는 회사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이유

만족과 불만족의 상관관계



식사시간이 되면 민망해지곤 한다. 민감하지 못한 혀 덕분이다. 왜 회사 밥이 맛없다고들 할까. 좀처럼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기 힘들다. 간혹 칭찬할 때면, 오늘은 괜찮네. 혹은 웬일? 정도다. 이럴 때면 동의를 구하는 동료들의 질문을 받곤 하는데, 맛나게 먹고 있던 나는 미안하게도 그저 씹을 뿐이다. 음식도 질문도.


음식은 기억을 싣고


비록 요리의 '요'자의 'ㅇ'도 모르는 나지만 음식을 대량으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알고 있다. 라면을 5인분 이상 끓여본 사람은 안다. 이게 여간해선 하나 끓일 때의 맛이 나질 않는다. 물의 양부터 필요한 화력 그리고 면발의 대류 이동까지, 맛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끓인 라면을 정말 맛있게 먹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두 끼를 굶던지, 그 옛날 대학 MT에서처럼 전날 인생 역대의 과음을 하면 된다. 두 경우 다 굉장히 좋은 방법이지만, 개인적으로 더 맛있게 먹었던 방법은 두 번째 방법이다. 절박함을 더할수록 너그러움의 폭은 커지기 마련이다.

             

배고픔의 달램에 비하면 생존을 위한 섭취는 임팩트가 남다르다.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쑥과 마늘이 필요했다면, 숙취에 감염된 좀비들이 사람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해장라면이 필요했다. 라면 한 젓가락과 한 모금의 라면 국물은 술에 절인 몸에 아직 살아 있다는 복음을 전파하는데, 해장라면을 찬양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지 싶다. 호로록 들이켜는 라면 국물에 서서히 깨어나는 몸속의 세포들. 아, 아직 살아 있구나... 조금 전까지 죽을 것 같다고 읊조리던 입에서 새삼 살겠다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아무튼, MT에서 과음 다음 날 먹던 라면은 멀쩡한 사람이 끓인 것도 아닌 데다 어기적어기적 몰려드는 좀비들을 위해 면에 면을, 물에 물을, 스프에 스프를 추가로 투척한 것이라 정상인(?)이 먹을 것이 못 됐다. 국물은 점점 걸쭉해지고 짜기는 상상 이상. 그럼에도 줄어드는 라면을 아쉬워하며 그렇게 맛나게 먹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그만한 약이 없기도 했지만, 언제나 배고팠던 시절이 또 그때였으니까.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던 시절, 해먹을 줄도 모르고 매끼 사 먹을 돈도 없던 나는 대부분 우유에 타 먹는 시리얼이나 별다른 조리가 필요하지 않은 3분 요리에 의존했다. 먹어도 배고프던 그때, MT를 끼니 해결의 한 방편으로 참여했던 나는 그래서인지 모든 음식이 감지덕지다.


그런 경험 덕분에 어딜 가든 밥 주는 사람에겐 잘 보이려는 나지만 결코 식당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짜거나 맹탕인 음식이 나올 때면 나 역시도 손이 가질 않는다. 그저 이왕 먹을 거 애써 맛없어하면서 먹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안타까움이다. 맛없다고 하면서 싹싹 긁어 비우는 건, 왠지 좀 서글프지 않나.


만족과 불만족


불만족은 늘 곁을 맴돈다. 그래서인지 어쩔 수 없이 배를 채우듯 뜻하지 않게 서글픔을 채우는 일이 흔하다. 어째서 평일이 일주일에 대한 지분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지, 돈 좀 불려보자고 시작한 투자는 어쩌다 간땡이만 불려 큰일을 치르게 했는지, 왜 몸은 튼튼하지 못해 무릎이 시리고 어깨가 결리는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과 쉽게 바꾸기 힘든 상황을 곱씹으면 입꼬리가 삐딱하게 내려간다.


그런 생각에 힘없이 고개를 숙일 때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것이 지난날의 기억이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잠 못 들던 날들, 자칫 큰일을 치를 수 있었던 치기 어린 시절의 생각 없는 행동들. 이런 기억들이 떨어지는 고개를 받쳐 든다. 그리고 부루퉁해진 내 볼을 꼬집으며 얘기한다.


"또 배부른 생각하고 있네..."


움찔. 그제야 이루지 못한 바람이 부루퉁한 볼에서 새어 나온다.


불만족에서 '불만'만 없애도 '족'한데, 하다못해 '불'만 떼어내도 '만족'스러운데, 그게 참 어렵다. 감정이 몰아치는 매 순간 누군가 옆에서 진정시켜 주는 것도 아닌 데다 스스로 감정을 억누른 채 차분히 상황을 되짚어 보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책 <불행피하기 기술>에서는 마음의 뺄셈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생각하는 대신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상상해 보라고. 그 진한 아쉬움을 느끼면서 현재의 충만감과 행복감을 맛보라고. 2천 년 전 스토아 철학자의 지혜에 깃댄 이 심리 트릭을 이용해서 끝 간데없는 간사한 마음을 요령껏 자제시켜 보라고 권한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는 상상은 출근하기 싫어 몸서리를 치는 나를 조금 더 높은 강도로 몸서리치게 만든다. 가족을 잃는다는 상상은 온종일 이불을 끌어안고 있고 싶은 주말에 거실로 달려가 가족을 끌어안게 만든다. 건강을 잃는다는 상상은 운동을 하루만 미루고 싶은 유혹을 하루 더 미루게 만든다. 그렇게 불만은 두려움에 물러나고 행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다행감은 제법 그득하게 채워져 하루를 보낼 힘이 된다.


현재의 만족과 불만족은 비교 대상을 동반한 감정이다. 비교 대상이 더 좋아 보이면 불만족스럽고 덜 좋아 보이면 만족스러운 그런 단순하고 가변적인 감정. 그러니까 만족과 불만족은 모든 비교를 접어두고 생각하면 딱히 기준이 없고 언제든 바꿀 수 있는, 믿을 것이 못 되는 '그냥 느낌'인 셈이다.


만족과 불만족은 절대적이지 않다. 변화무쌍하고 상대적이다. 이것만 기억해도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덕분에 지금 가진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나와 잃는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가지며 만족감을 느끼는 나는 같은 존재임에도 다른 인격체가 된다. 잠깐의 감정이입만으로도 극단적으로 변하는 나의 줏대 없음이 이럴 땐 참 고맙다.


나는 부족했던 지난날 덕분에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지금 덕분에 훗날 만족할 수 있는 여지도 남겨(?)두고 있다. 가진 게 워낙 적어 채울 것이 많다는 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부족하다고 해서 불행의 그늘이 짙어지진 않았다. 이래저래 대충 만족할만하다.


당연해하지 않을 때, 만족은 조금 더 오래 머문다. 간사함을 기본 탑재한 인간의 마음이라 언제 또 불만을 토로할진 모르지만, 그 유예기간을 늘려나가려 오늘도 견딜만한 불만을 다행거리로 만들고 있다. 배고팠던 학창 시절의 충분하지 않음이 지금의 충분함이 되었듯, 불만족스러운 지금이 언젠가 만족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회사의 식사 제공 업체가 변경되었을 때, 둔감한 나를 대신한 사람들의 평가가 이어졌다. "지난번보다 낫네", "괜찮아졌네", "맛있네" 확실히... 불만족이 만족의 씨앗이긴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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